世家-絳侯周勃世家
<주발의 내력과 군공>
絳侯周勃者, 沛人也. 其先巻人, 徙沛. 勃以織薄曲為生, 常為人吹簫給喪事, 材官引彊.
강후주발자 패인야. 기선권인 사패. 발이직박곡위생 상위인취소급상사 재관인강.
강후(絳侯) 주발(周勃)은 패현(沛縣) 사람이다. 그 선조는 권(卷)지역 사람인데 패현으로 이주했다. 주발은 대나무 따위로 만든 누에치기 용구를 만들어 생계를 꾸렸는데, 초상이 나면 늘 사람들을 위해 피리를 불어주며 강궁을 쏘는 재관(材官:일종의 예비군)이 되었다.
高祖之為沛公初起, 勃以中涓従攻胡陵, 下方與. 方與反, 與戦, 卻適. 攻豊. 撃秦軍碭東. 還軍留及蕭. 复攻碭, 破之. 下下邑, 先登. 賜爵五大夫. 攻蒙、虞, 取之.
고조지위패공초기 발이중연종공호릉 하방여. 방여반 여전 각적. 공풍. 격진군탕동. 환군유지소. 복공탕 파지. 하하읍 선등. 사작오대부. 공몽 여 취지.
고조(高祖)가 패공(沛公)으로 막 봉기하자 주발은 중연(中涓)으로 (고조를) 따라서 호릉(胡陵)을 공격하고 방여(方與)를 함락시켰다. 방여가 반발하자 전투에 참여하여 적을 물리쳤다. 풍읍(豐邑)을 공격하고 탕군(碭郡) 동쪽에서 진(秦)나라의 군대를 공격했다. 군대를 유현(留縣)과 소현(蕭縣)으로 돌려 다시 탕군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하읍(下邑)을 함락할 때는 먼저 성에 올랐다. 오대부(五大夫)의 작위가 내려졌다. 몽읍(蒙邑)과 우현(虞縣)을 공격하여 취했다.
撃章邯車騎, 殿. 定魏地. 攻爰戚、東緡, 以往至栗, 取之. 攻齧桑, 先登. 撃秦軍阿下, 破之. 追至濮陽, 下甄城. 攻都関、定陶, 襲取宛朐, 得単父令. 夜襲取臨済, 攻張, 以前至巻, 破之. 撃李由軍雍丘下. 攻開封, 先至城下為多. 後章邯破殺項梁, 沛公與項羽引兵東如碭. 自初起沛還至碭, 一歳二月.
격장한거기 전. 정위지. 공원척 동민 이왕지율 취지. 공설상 선등. 격진군아하 파지. 추지복양 하견성, 공도관 정도 습취완구 득선보령. 야습취임제 공장 이전지권 파지. 격이유군옹구하. 공개봉 선지성하위다. 후장한파살항량 패공여항우인병동여탕. 자초기해환지탕 일세이월.
장한(章邯)의 전차병과 기병을 공격할 때는 맨 나중에 철수했다. 위(魏)나라 지역을 평정했다. 원척(爰戚)과 동민(東緡)을 공격하고 율(栗)로 가서 그곳을 취했다. 설상(齧桑)을 공격할 때에 성에 먼저 올랐다. 동아(東阿) 아래에서 진(秦)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복양(濮陽)까지 뒤쫓아 견성(甄城)을 함락시켰다. 도관(都關)과 정도(定陶)를 공격하고 완구(宛朐)를 기습하여 취하고 선보(單父) 현령을 잡았다. 임제(臨濟)를 야긴 기습으로 취하고, 장현(張縣)을 공격하고, 선봉에 서서 권현(卷縣)에 이르러 그곳을 격파했다. 옹구(雍丘) 아래에서 이유(李由)의 군대를 공격했다. 개봉(開封)을 공격할 때는 먼저 성 아래에 이른 사람이 많았다. 그 뒤 장한이 항량(項梁)을 격파하고 죽이니, 패공은 항우(項羽)와 병사들을 이끌고 동쪽 탕군으로 갔다. 처음 패현에서 봉기하여 탕군으로 돌아올 때까지 일 년 두 달이었다.
楚懐王封沛公号安武侯, 為碭郡長. 沛公拝勃為虎賁令, 以令従沛公定魏地. 攻東郡尉於城武, 破之. 撃王離軍, 破之. 攻長社, 先登. 攻潁陽、緱氏, 絶河津. 撃趙賁軍尸北. 南攻南陽守齮, 破武関、嶢関. 破秦軍於藍田, 至咸陽, 滅秦.
초회왕봉패공호안무후 위탕군장. 패공배발위호분령 이령종패공정위지. 공동군위어성무 파지. 격왕리군 파지. 공장사 선등. 공영양 구씨 절하진. 격조분군시북. 남공남양수의 파무관 요관. 파진군어람전 지함양 멸진.
초나라 회왕(懷王)은 패공을 안무후(安武侯)에 봉하고 탕군의 군수로 삼았다. 패공은 주발을 호분령(虎賁令)에 임명했다. 호분령으로 패공을 따라 위(魏)나라 지역을 평정했다. 성무(城武)에서 동군(東郡) 군위(郡尉)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왕리(王離)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장사(長社)를 공격할 때 먼저 성루에 올랐다. 영양(潁陽)과 구지(緱氏)를 공격하여 황하 나루를 끊었다. 시향(尸鄕) 북쪽에서 조분(趙賁)의 군대를 공격했다. 남쪽으로 남양(南陽) 군수 여의(呂齮)를 공격했다. 무관(武關)과 요관(嶢關)을 격파했다. 남전(藍田)에서 진(秦)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함양(咸陽)에 이르러 진(秦)나라를 멸망시켰다.
項羽至, 以沛公為漢王. 漢王賜勃爵為威武侯. 従入漢中, 拝為将軍. 還定三秦, 至秦, 賜食邑懐徳.
항우지 이패공위한왕. 한왕사발작위위무군. 종입한중 배위장군. 환정삼진 지진 사식읍회덕.
항우가 이르러 패공을 한왕(漢王)에 봉했다. 한왕은 주발에게 위무후(威武侯)의 작위를 내렸다. (한왕을) 따라서 한중(漢中)으로 들어가자 장군에 임명했다. (관중으로) 돌아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진(秦)나라에 이르자 (한왕은) 회덕현(懷德縣)을 식읍으로 내렸다.
攻槐里、好畤, 最. 撃趙賁、内史保於咸陽, 最. 北攻漆. 撃章平、姚卬軍. 西定汧. 還下郿、頻陽. 囲章邯廃丘. 破西丞. 撃盗巴軍, 破之. 攻上邽. 東守嶢関. 転撃項籍. 攻曲逆, 最. 還守敖倉, 追項籍. 籍已死, 因東定楚地泗水、東海郡, 凡得二十二県.
공괴리 호치 최. 격조문 내사보어함양 최. 북공칠. 격장평 요앙군. 서정견. 환하미 번양. 위장한폐구. 파서승. 격도파군 파지. 공상규. 동수요관. 전격항적. 공곡역 최. 환수오창 추항적. 적이사 인동정초지사수 동해군 범득이십이현.
괴리(槐里)와 호치(好畤) 공격에서도 공이 가장 많았다. 함양에서 조분과 내사(內史) 보(保)를 공격할 때에도 최고였다. 북으로 칠현(漆縣)을 공격했고, 장평(章平)과 요앙(姚卬)의 군대를 공격했으며, 서쪽으로 견현(汧縣)을 평정했다. 돌아와 미성(郿城)과 번양(頻陽)을 함락시켰다. 장한(章邯)을 폐구(廢丘)에서 포위 공격했다. 서현(西縣) 현승(縣丞)을 격파하고, 도파(盜巴)의 부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상규(上邽)를 공격하고 동쪽 요관(嶢關)을 지켰다. 군대를 돌려 항적(항우)을 공격했다. 곡우(曲遇) 공격에서도 최고였다. 돌아와 오창(敖倉)을 지키다가 항우를 추격했다. 항우가 죽자, 그 참에 동쪽으로 초나라 지역인 사수(泗水)와 동해(東海) 두 군(郡)을 평정하고 모두 22개 현을 취했다.
還守雒陽、櫟陽, 賜與潁陰侯共食鍾離. 以将軍従高帝反者燕王臧荼, 破之易下. 所将卒當馳道為多. 賜爵列侯, 剖符世世勿絶. 食絳八千一百八十戸, 号絳侯.
환수락양 역양 사여영음후공식종리. 이장군종고제반자연왕장도 파지역하. 소장졸당치도위다. 사작열후 부부세세물절. 식강팔천일백팔십호 호강후.
돌아와 낙양(雒陽)과 역양(櫟陽)을 수비했다. 종리현(鍾離縣)을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과 공유하는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장군으로 고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연왕(燕王) 장도(臧荼)를 역성(易城) 아래에서 격파시켰다. 그가 이끄는 장수와 병졸들이 늘 앞장서서 길을 개척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후 반열에 올리고 부절을 나누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했다. 강(絳) 8,180호를 식읍으로 삼게 하여 강후(絳侯)로 불렀다.
<한나라 초기 정권 안정과 주발의 역할>
以将軍従高帝撃反韓王信於代, 降下霍人. 以前至武泉, 撃胡騎, 破之武泉北. 転攻韓信軍銅鞮, 破之. 還, 降太原六城. 撃韓信胡騎晉陽下, 破之, 下晉陽. 後撃韓信軍於硰石, 破之, 追北八十里. 還攻樓煩三城, 因撃胡騎平城下, 所将卒當馳道為多. 勃遷為太尉.
이장군종고제격반한왕신어대 항하곽인. 이전지무천 격호기 파지무천북. 전공한신군동제 파지. 환 강대원육성. 격한신호기진양하 파지 하진양. 후격한신군어사석 파지 추북팔십리. 환공루번삼성 인격호기평성하 소장졸당치도위다. 발천태위.
장군으로 고제를 따라서 반란을 일으킨 한왕(韓王) 신(信)을 대(代)에서 토벌하고 곽인현(霍人縣)을 항복시켰다. 앞장서서 무천(武泉)에 이르러 흉노의 기병을 공격하여 무천 북쪽에서 격파했다. 군대를 돌려서 한왕 신의 군대를 동제(銅鞮)에서 공격하여 격파했다. 돌아오면서 태원군(太原郡)의 여섯 개의 성을 항복시켰다. 진양성(晉陽城) 아래에서 한왕 신과 흉노의 기병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진양성을 함락시켰다. 그 뒤 사석(硰石)에서 한왕 신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북으로 80리를 뒤쫓았다. 돌아와 누번(樓煩)의 성 세 개를 공격하고, 그 참에 평성(平城) 아래에서 흉노의 기병을 공격했다. 그가 거느린 장수와 병졸들은 늘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주발은 태위(太尉)로 승진했다.
撃陳豨, 屠馬邑. 所将卒斬豨将軍乗馬絺. 撃韓信、陳豨、趙利軍於樓煩, 破之. 得豨将宋最、鴈門守圂. 因転攻得雲中守遫、丞相箕肆、将勳. 定鴈門郡十七県, 雲中郡十二県. 因复撃豨霊丘, 破之, 斬豨, 得豨丞相程縦、将軍陳武、都尉高肆. 定代郡九県.
격진희 도마읍. 소장졸참희장군승마치. 격한신 진희 조리둔어루번 파지. 득희장송최 안문수환. 인전공득영주수속 승상기사 장훈. 정안문군칠십현 운중군십이현. 인복격휘영구 파지 참희 득희승상정종 장군진무 도위고사, 정대군구현,
진희(陳豨)를 공격하여 마읍현(馬邑縣)을 도륙했다. 장졸들이 진희의 장군 승마치(乘馬絺)를 베었다. 한왕 신, 진희, 조리(趙利)의 군대를 누번에서 공격하여 격파했고, 진희의 부장(部將) 송최(宋最)와 안문군(雁門郡)의 군수 환(圂)을 사로잡았다. 내친 김에 운중군(雲中郡)을 공격해서 군수 속(遫), 승상 기사(箕肆)와 장군 훈(勳)을 사로잡으니 안문군의 17개 현과 운중군의 12개 현이 평정되었다. 다시 기세를 타고 영구(靈丘)에서 진희를 격파하여 진희를 베고 그의 승상 정종(程縱), 장군 진무(陳武), 도위(都尉) 고사(高肆)를 포로로 잡으니 대군(代郡)의 9개 현이 평정되었다.
燕王盧綰反, 勃以相国代樊噲将, 撃下薊, 得綰大将抵、丞相偃、守陘、太尉弱、御史大夫施, 屠渾都. 破綰軍上蘭, 复撃破綰軍沮陽. 追至長城, 定上谷十二県, 右北平十六県, 遼西、遼東二十九県, 漁陽二十二県. 最従高帝得相国一人, 丞相二人, 将軍、二千石各三人;別破軍二, 下城三, 定郡五, 県七十九, 得丞相、大将各一人.
연왕노관반 발이상국대번쾌장 격하계 득관대장지 승상언 수경 태위약 어사부부시 도혼도. 파관군상란 복격파관군저양, 추지장성 정상곡십이현 우불평십육현 요서 요동이십구현 어양이십이현. 최종고제득상국일인 승상이인 장군 이천석각삼인 별파군이 하성삼 정군오 현칠십구 득승상 대강각일인.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발은 상국으로 번쾌(樊噲) 대신 장수가 되어 계현(薊縣)을 함락시켰고, 노관의 대장 지(抵), 승상 언(偃), 군수 경(陘), 태위 약(弱)과 어사대부 시(施)를 잡고 혼도(渾都)를 도륙했다. 상란(上蘭)에서 노관의 군대를 격파했고, 다시 저양(沮陽)에서 노관의 군대를 격파하고는 장성(長城)까지 추격하니 상곡군(上谷郡)의 12개 현, 우북평군(右北平郡)의 16개 현,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의 29개 현, 어양군(漁陽郡)의 22개 현이 평정되었다. 고조를 따라서 도합 상국 1명, 승상 2명, 장군과 2천 석(石) 관리 각 3명을 잡았고, 별도로 2개 부대를 격파하고 3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5개 군, 79현을 평정했으며 승상과 대장 각 1명을 잡았다.
勃為人木彊敦厚, 高帝以為可属大事. 勃不好文学, 毎召諸生説士, 東郷坐而責之:「趣為我語.」其椎少文如此.
발위인본강돈후 고제이위가속대사. 발불호문학 매소제생설사 동향좌이책지 ‘취위아어’ 기추소문여차.
주발은 사람이 소박하고 강직하며 후덕하여 고제는 큰일을 맡길 수 있다고 여겼다. 주발은 글이나 꾸미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아서 매번 학자나 유세객들을 불러서는 동쪽을 향해 앉아서 “내게 할 말이 있으면 얼른얼른 하시오!”라며 재촉했다. 그 둔하고 꾸밈없기가 이와 같았다.
勃既定燕而帰, 高祖已崩矣, 以列侯事孝恵帝. 孝恵帝六年, 置太尉官, 以勃為太尉. 十歳, 高后崩. 呂祿以趙王為漢上将軍, 呂産以呂王為漢相国, 秉漢権, 欲危劉氏.
발기정연이귀 고조이붕의 이열후사효혜제. 효혜제육년 치태위관 이발위태위. 십세 고푸붕. 여록이조왕위한상장군 여산이여왕위한상국 병한권 욕위유씨.
주발이 연(燕)나라를 평정하고 돌아오니 고조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제후 반열에서 효혜제(孝惠帝)를 섬겼다. 혜제 6년에 태위관(太尉官)을 두어 주발을 태위로 임명했다. 10년 뒤, 여후(呂后)가 세상을 떠났다. 여록(呂祿)이 조왕(趙王)으로 한나라의 상장군(上將軍)이 되었고, 여산(呂産)은 여왕(呂王)으로 한의 상국이 되어 한나라의 권력을 쥐고 유씨를 위태롭게 했다.
勃為太尉, 不得入軍門. 陳平為丞相, 不得任事. 於是勃與平謀, 卒誅諸呂而立孝文皇帝. 其語在呂后、孝文事中.
발위태위 부득입군문. 진평위승상 부득임사. 어시발여평모 졸주제여이립효문황제 기어재여후 효문사중.
주발은 태위인데도 군문에 들어갈 수 없었고, 진평(陳平)은 승상인데도 일을 맡을 수 없었다. 이에 주발은 진평과 모의해 마침내 여씨들을 죽이고 효문황제(孝文皇帝)를 옹립했다. 이 일은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와 「효문제본기(孝文帝本紀)」에 있다.
<만년의 주발>
文帝既立, 以勃為右丞相, 賜金五千斤, 食邑萬戸. 居月余, 人或説勃曰:「君既誅諸呂, 立代王, 威震天下, 而君受厚賞, 処尊位, 以寵, 久之即禍及身矣.」
문제기립 이발위우승상 사금오천근 식읍만호. 거월여 인록설발왈 ‘군기주제여 립대왕 위진천하 이군수후상 처존위 이총 구지즉와급신의’
문제(文帝)는 즉위하자, 주발을 우승상(右丞相)으로 삼고, 황금 5천근과 식읍을 1만 호까지 내렸다. 한 달 남짓 뒤에 누군가가 주발에게 ‘그대가 여씨들을 죽이고 대왕을 옹립하니 그 위세가 천하를 떨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큰 상과 귀한 자리를 받고 총애를 얻었으나 이것이 오래가면 화가 몸에 미칠 것입니다.’라고 했다.
勃懼, 亦自危, 乃謝請帰相印. 上許之.
발구 역자위 내사청귀상인. 상허지.
주발은 두려웠다. 또 스스로 위기를 느끼고는 바로 사직을 청하고 승상의 도장을 반환하니 주상이 이를 허락했다.
歳余, 丞相平卒, 上复以勃為丞相. 十余月, 上曰:「前日吾詔列侯就国, 或未能行, 丞相吾所重, 其率先之.」乃免相就国.
세여 승상평졸 상복이발위승상. 십여월 상왈 ‘전인오조열후취국 혹미능행 승상오소중 지솔선지’ 내면상취국.
일 년 남짓 지나 승상 진평이 죽자, 주상은 다시 주발을 승상에 임명했다. 열 달 남짓 뒤, 주상은 ‘지난 번 내가 조서를 내려 제후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도 있소. 승상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 솔선하여 돌아가시오.’라고 했다. 이에 승상을 사직하고 봉국으로 돌아갔다.
歳余, 毎河東守尉行県至絳, 絳侯勃自畏恐誅, 常被甲, 令家人持兵以見之.
세여 매하동수위행련지강 강후발자외공주 상피갑 영가인지병이견지.
일 년 남짓 지나 하동군(河東郡)의 군수와 군위가 현을 순시하다가 강현에 이르니 강후 주발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늘 몸에 갑옷을 두르고 집안사람들에게도 병기를 지니고 그들을 만나게 했다.
其後人有上書告勃欲反, 下廷尉. 廷尉下其事長安, 逮捕勃治之. 勃恐, 不知置辞. 吏稍侵辱之. 勃以千金與獄吏, 獄吏乃書牘背示之, 曰「以公主為証」. 公主者, 孝文帝女也, 勃太子勝之尚之, 故獄吏教引為証.
기후인유상서고발욕반 하정위. 정위하기사장안 체포발치지. 발공 부지치사. 사초침욕지. 발이천금여옥리 옥리내서독뱌시지 왈 ‘이공주위증’ 공주자 효문제여야 발태가승지상지 고옥리교인위증.
그 뒤, 누군가가 글을 올려 주발이 반역을 꾀한다고 알리자 정위(廷尉)에게 처리하게 했다. 정위는 그 건을 장안으로 내려 보내서 주발을 체포하여 다스리게 했다. 주발은 겁이 나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옥리가 갈수록 더 주발에게 모욕을 주자 주발은 천금을 옥리에게 주었다. 옥리는 목간의 뒷면에다 ‘공주를 증인으로 삼으라.’라고 써서는 주발에게 보여주었다. 공주는 효문제의 딸로 주발의 맏아들 승지(勝之)의 아내였다. 이 때문에 옥리는 공주를 끌어다 증인으로 삼으라고 한 것이다.
勃之益封受賜, 尽以予薄昭. 及繋急, 薄昭為言薄太后, 太后亦以為無反事. 文帝朝, 太后以冒絮提文帝, 曰:「絳侯綰皇帝璽, 将兵於北軍, 不以此時反, 今居一小県, 顧欲反邪!」
발지익봉수사 진이여박소. 급계급 박소위언박태후 태후역이위무반사. 문제조 태후이모서제문재 왈 ‘강후돤황제새 장병어북군 불이차시반 금거일소현 고욕반사’
주발은 추가로 받았던 땅이며 상을 모두 박소(薄昭)에게 준 바 있었다. 일이 급박해지자 박소가 박(薄) 태후에게 주발을 위해 사정을 말했고, 박 태후 역시 반역과 같은 일은 없다고 여겼다. 문제가 인사를 드리러 오자, 태후는 두건으로 문제를 때리며 ‘강후는 황제의 옥새를 갖고 북군을 거느리고 있을 때도 반역하지 않았는데, 지금 작은 현 하나를 갖고서 반역을 꾀하려고 했겠습니까?’라고 했다.
文帝既見絳侯獄辞, 乃謝曰:「吏方験而出之.」於是使使持節赦絳侯, 复爵邑. 絳侯既出, 曰:「吾嘗将百萬軍, 然安知獄吏之貴乎!」
문제기견강후옥사 내사왈 ‘리방험이출지’ 어시사사지절사강후 복작읍. 강후기출 왈 ‘오산장백만군 연안지옥히지귀호’
문제는 강후의 옥중 진술서를 보았기에 바로 사죄하며 ‘관리들이 바로 증거를 살펴서 내보낼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사신을 시켜 부절을 가지고 가서 강후를 사면시키고 작위와 봉읍을 회복시켰다. 옥에서 나온 강후는 ‘내가 일찍이 백만 대군을 거느렸지만 옥리가 이렇게 대단한 줄 어찌 알았으랴!’라고 했다.
絳侯复就国. 孝文帝十一年卒, 謚為武侯. 子勝之代侯. 六歳, 尚公主, 不相中, 坐殺人, 国除. 絶一歳, 文帝乃択絳侯勃子賢者河内守亜夫, 封為条侯, 続絳侯後.
강후복취국. 효문제십일년졸 시위무후. 자승지대후. 육새 상공주 불상중 좌살인 국제. 절일세 문제내택강후발자현자하내수아부 봉위조후 속강후후.
강후는 다시 봉국으로 돌아갔고, 효문제 11년에 죽었다. 시호를 무후(武侯)라 했다. 아들 주승지(周勝之)가 후작을 이었다. 6년 뒤에 아내인 공주와 사이가 맞지 않고 살인에 연루되어 나라가 해체되었다. 나라가 끊어진 지 일 년 뒤 문제는 강후 주발의 아들 중 유능한 하내(河內) 군수 주아부(周亞夫)를 택하여 조후(條侯)에 봉하여 강후의 뒤를 잇게 했다.
(周亞夫)
<오나라와 초나라, 7국의 난과 주발의 아들 주아부의 공로>
条侯亜夫自未侯為河内守時, 許負相之, 曰:「君後三歳而侯. 侯八歳為将相, 持国秉, 貴重矣, 於人臣無両. 其後九歳而君餓死.」
조후아부자미후위하내수시 허부상지 왈 ‘군후삼세이후. 후팔세위장상 지국병 귀중의 어인신무량. 기후구세이군아사’
조후 주아부가 하내군수일 때 허부(許負)가 그의 관상을 보고는 ‘그대는 3년 뒤 후작을 받을 것이고, 후작이 된 뒤 8년 뒤 장상이 되어 나라의 대권을 쥐게 되어 그 귀하기가 신하들 중 둘도 없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9년 뒤에 그대는 굶어 죽을 겁니다.’라고 했다.
亜夫笑曰:「臣之兄已代父侯矣, 有如卒, 子當代, 亜夫何説侯乎? 然既已貴如負言, 又何説餓死? 指示我.」
아부소왈 ‘신지영이대부후의 유여졸 자당대 아부하설후호 연기이책여부언 우하성아사 지시아’
주아부는 웃으며 ‘신의 형이 이미 아버님의 후작을 이었고, 돌아가시면 당연히 그 아들이 뒤를 이를 것이니 주아부가 어찌 제후가 된다고 말하시오? 또 허부 당신 말대로 부귀해진다고 해놓고 또 굶어죽는다는 것은 무슨 말이오? 내게 잘 좀 알려주시오.’했다.
許負指其口曰:「有従理入口, 此餓死法也.」
허부지기구왈 ‘유종리입구 차아사법야’
허부는 주아부의 입을 가리키며 ‘세로선이 입까지 내려와 있는데, 이것이 굶어죽을 징조입니다.’라고 했다.
居三歳, 其兄絳侯勝之有罪, 孝文帝択絳侯子賢者, 皆推亜夫, 乃封亜夫為条侯, 続絳侯後.
거삼세 기형강후승지유죄 효문제택강후자현자 개추아부 내봉아부위조후 속강후후.
그로부터 3년 뒤에 그 형 강후 승지가 죄를 지었고, 문제는 강후의 아들 중 똑똑한 자를 고르니 모두들 주아부를 추천하여 주아부를 조후에 봉하고 강후의 뒤를 잇게 했다.
文帝之後六年, 匈奴大入邊. 乃以宗正劉礼為将軍, 軍霸上;祝茲侯徐厲為将軍, 軍棘門;以河内守亜夫為将軍, 軍細柳:以備胡. 上自勞軍. 至霸上及棘門軍, 直馳入, 将以下騎送迎. 已而之細柳軍, 軍士吏被甲, 鋭兵刃, 彀弓弩, 持満. 天子先駆至, 不得入.
문제지후육년 흉노대입변. 내이종정유례위장군 군패상 축자후서려위장군 군극문 이하내수아부위장군 군세류 이비호. 상자노군. 지패상급극문군 직치입 장이하기송영 이이지세류군 군사리피갑 에병인 구궁노 지만. 천자선구지 부득입.
문제 후원(後元) 6년에 흉노가 변경을 대거 침입했다. 이에 종정(宗正) 유례(劉禮)를 장군으로 삼아 패상(霸上)에 주둔시키고, 축자후(祝玆侯) 서려(徐厲)를 장군으로 삼아 극문(棘門)에 주둔시키는 한편 하내군수 주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세류(細柳)에 주둔시켜 흉노를 방비하게 하고는 주상이 몸소 군을 위로하러 갔다. 패상과 극문의 군영에 이르러서는 곧장 말을 달려 안으로 들어가니 장군 이하 모두가 말을 타고 나와 맞이했다. 다음으로 세류의 군영에 이르자 군사와 군리들이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병기를 들고 화살에 활을 팽팽하게 매겨놓고 있었다. 천자의 선발대가 도착했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先駆曰:「天子且至!」軍門都尉曰:「将軍令曰『軍中聞将軍令, 不聞天子之詔』.」居無何, 上至, 又不得入. 於是上乃使使持節詔将軍:「吾欲入勞軍.」亜夫乃傳言開壁門. 壁門士吏謂従属車騎曰:「将軍約, 軍中不得駆馳.」於是天子乃按轡徐行. 至営, 将軍亜夫持兵揖曰:「介冑之士不拝, 請以軍礼見.」
선구왈 ‘천자차지’ 군문도위왈 ‘장군영왈 “군중문장군령 불문천자지조”’ 거무하 상지 우부득입. 어시상냐사사지절조장군 ‘오욕입노군’ 아부내전언개벽문. 벽문사리위종속거기왈 ‘장군약 군중부득구치’ 어시천자내안비서행. 지영 장군아부지병읍왈 ‘개주지사불배 청이군례현’
선발대가 ‘천자께서 곧 오신다.’라고 하자 군문의 도위는 ‘장군께서 명령하시길 “군중에서는 장군의 명령을 듣지 천자의 조서라도 듣지 않는다.”고 하셨소.’라고 했다. 얼마 뒤 주상이 도착했으나 역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주상은 사신에게 부절을 갖고 가서 장군에게 ‘내가 들어가 군을 위로하여 한다.’라고 전하게 했다. 주아부는 그때서야 군영의 문을 열라고 전했다. 군영의 문을 지키는 군관이 황제를 따르는 수레와 기병들에게 ‘장군께서 군중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다고 규정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천자는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군영에 이르자 장군 주아부가 무기를 든 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병사는 머리숙여 절하지 않으니 군대의 예로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天子為動, 改容式車. 使人称謝:「皇帝敬勞将軍.」成礼而去. 既出軍門, 群臣皆驚. 文帝曰:「嗟乎, 此真将軍矣! 曩者霸上、棘門軍, 若児戯耳, 其将固可襲而虜也. 至於亜夫, 可得而犯邪!」称善者久之. 月余, 三軍皆罷. 乃拝亜夫為中尉.
천자위동 개용식거. 사인칭사 ‘황제경노장군’ 성례이거. 기출군문 군신개경. 문제왈 ‘차호 차진장군의 낭자패상 극문군 약아희이 기장고가습이노야. 지어아부 가득이범사’ 칭선자그지. 월여 삼군개파. 내배아부위중위.
천자는 감동하여 얼굴색을 바꾸고 수레의 횡목을 잡고는 사람을 시켜 ‘황제가 삼가 장군을 위로하는 바이오.’라고 치하했다. 예를 마치고 군영을 떠나 군문을 나서니 신하들이 모두 놀랐다. 문제는 ‘아, 이야말로 진정한 장군이로다! 지난 번 패상과 극문의 군대는 애들 놀이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 장수들은 기습하여 포로로 잡을 수도 있겠지만 주아부는 누가 감히 범하겠는가!’라며 한참 동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달 지나 삼군은 모두 철수했고, 주아부를 중위(中尉)에 임명했다.
孝文且崩時, 誡太子曰:「即有緩急, 周亜夫真可任将兵.」文帝崩, 拝亜夫為車騎将軍.
효문차붕시 계태자왈 ‘즉유완급 주아부진가임장병’ 문제붕 배아부위거기장군.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태자에게 ‘급한 일이 있으면 주아부가 제대로 군대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두었다. 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주아부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했다.
孝景三年, 呉楚反. 亜夫以中尉為太尉, 東撃呉楚. 因自請上曰:「楚兵剽軽, 難與争鋒. 願以梁委之, 絶其糧道, 乃可制.」上許之.
효경삼년 오초반. 아부이중위위테위 동격오초. 인자청상왈 ‘초병표경 난여쟁봉. 원이양위지 절기양도 내가제’ 상허지.
효경제(孝景帝) 3년에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아부는 중위로서 태위(太尉)의 직무를 대행하여 동쪽으로 오나라와 초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면서 직접 주상에게 ‘오나라와 초나라가 강하고 민첩하여 맞서 싸우기 어렵습니다. 양나라에 맡겨 놓은 다음 저들의 식량 운송로를 끊으면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요청하니 주상은 이를 허락했다.
太尉既会兵滎陽, 呉方攻梁, 梁急, 請救. 太尉引兵東北走昌邑, 深壁而守. 梁日使使請太尉, 太尉守便宜, 不肯往. 梁上書言景帝, 景帝使使詔救梁. 太尉不奉詔, 堅壁不出, 而使軽騎兵弓高侯等絶呉楚兵後食道. 呉兵乏糧, 飢, 數欲挑戦, 終不出. 夜, 軍中驚, 内相攻撃擾亂, 至於太尉帳下. 太尉終臥不起. 頃之, 复定.
태위기회병형양 오방공양 양급 청구. 태위인병동북주창읍 심벽이수. 양일사사청태위 태위수변의 불긍왕. 양상서언경제 경제사사조구양. 태위불봉조 견벽불출 이사경기병궁고후증절오초병우식도. 오병핍랸 기 수욕도전 종불출. 야 군중경 내상공격요란 지어태위장하. 태위종와불기 경지 복정.
태위가 형양(滎陽)에서 병사들과 합류하자 오나라가 막 양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양나라가 위급해지자 구원을 요청했다. 주아부가 병사들을 이끌고 동북쪽 창읍(昌邑)으로 가서는 보루를 깊이 판 채 수비에 들어갔다. 양나라가 하루가 멀다 하고 사신을 보내 태위에게 요청했으나 태위는 유리한 지형을 지킨 채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양나라가 경제에게 글을 올려 상황을 말하자 경제는 사신을 보내 양나라를 구하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태위는 조서를 받들지 않고 보루를 단단히 지키면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궁고후(弓高侯) 등에게 경기병(輕騎兵)으로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의 후방 식량 보급로를 끊게 했다. 오나라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리자 몇 번이고 싸움을 걸어왔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한 번은 밤에 군문 안에서 서로 치고받는 소란이 일어나 태위의 군막까지 알려졌으나 태위는 끝내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뒤 다시 진정되었다.
後呉奔壁東南陬, 太尉使備西北. 已而其精兵果奔西北, 不得入. 呉兵既餓, 乃引而去. 太尉出精兵追撃, 大破之.
후오분벽동남추 태위사비서북. 이이기정병과분서북 부득입. 오병기아 내인이거 태위출병추격 대파지.
그 뒤에 오나라군이 보루 동남쪽 귀퉁이를 습격했는데, 태위는 서북쪽을 방비하게 했다. 잠시 뒤 오나라군의 정예병이 과연 서북쪽을 공격해왔으나 침입하지 못했다. 오나라군은 굶주림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태위는 정예병을 내어 추격하여 대파했다.
呉王濞棄其軍, 而與壮士數千人亡走, 保於江南丹徒. 漢兵因乗勝, 遂尽虜之, 降其兵, 購呉王千金. 月余, 越人斬呉王頭以告. 凡相攻守三月, 而呉楚破平. 於是諸将乃以太尉計謀為是. 由此梁孝王與太尉有卻.
오왕유비기기군 이여장사수천인망주 보어강남잔사. 한병인승승 수진노지 앙기병 살오왕천금. 월여 월인참오왕두이고. 범상공수삼월 이오초파평. 어시제장내이태위계모위시. 유차양효왕여태위유각.
오왕 유비(劉濞)는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장사 수천 명과 도주하여 강남 단도현(丹徒縣)을 거점으로 삼았다. 한나라의 병력은 승세를 몰아 마침내 전부를 포로로 잡고 그 병사들을 항복키는 한편 오왕에게 천금을 현상금으로 걸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월(越) 사람이 오왕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다. 전후 서로 석 달 동안 치고 받은 끝에 오나라와 초나라를 깨고 평정했다. 이에 장수들은 태위의 계책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으나 이 때문에 양효왕과 태위 사이에는 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주아부의 죽음>
帰, 复置太尉官. 五歳, 遷為丞相, 景帝甚重之.
귀 복치태위관. 오세 천위승상 경제심중지.
돌아오자 다시 태위관(太尉官)으로 복귀했고, 5년 뒤에는 승상으로 승진하니 경제가 더욱 그를 중시했다.
景帝廃栗太子, 丞相固争之, 不得. 景帝由此疏之. 而梁孝王毎朝, 常與太后言条侯之短.
경제폐율태자 승상고쟁지 부득. 경제유차소지. 이양효왕매조 상여태후언조후지단.
경제가 율태자(栗太子)를 폐하려고 할 때 승상은 한사코 이를 따졌으나 소용없었다. 경제가 이 일로 그를 멀리 했다. 그리고 양효왕은 입조할 때마다 늘 태후에게 조후의 단점을 말했다.
竇太后曰:「皇后兄王信可侯也.」景帝譲曰:「始南皮、章武侯先帝不侯, 及臣即位乃侯之. 信未得封也.」
두태후왈 ‘황후형왕신가후야’ 경제양왈 ‘시남피 장무후선제불후 급신즉위내후지 신미득봉야’
두 태후가 ‘왕 황후의 오라비 왕신(王信)이 제후가 될 만하오.’라고 했다. 경제는 ‘당초 남피후(南皮侯)와 장무후(章武侯)는 선제께서 제후로 삼지 않으셨고, 신이 즉위하고서야 그들을 제후로 봉했습니다. 왕신은 봉할 수 없습니다.’라며 사양했다.
竇太后曰:「人主各以時行耳. 自竇長君在時, 竟不得侯, 死後乃(封)其子彭祖顧得侯. 吾甚恨之. 帝趣侯信也!」
두태후왈 ‘인주각이시행이. 자두장군재시 경부득후 사후내봉기가퍙조고득후. 오신한지 제취후신야’
두 태후는 ‘군주는 때에 따라 일을 처리할 뿐입니다. 두장군(竇長君)은 생전에 끝내 제후가 되지 못하고 죽은 뒤, 그 아들 두팽조(竇彭祖)가 거꾸로 제후가 되었지요. 내가 이 일이 참 한이 됩니다. 황제께서는 어서 왕신을 제후로 삼으세요.’라고 했다.
景帝曰:「請得與丞相議之.」丞相議之, 亜夫曰:「高皇帝約『非劉氏不得王, 非有功不得侯. 不如約, 天下共撃之』. 今信雖皇后兄, 無功, 侯之, 非約也.」景帝黙然而止.
경제왈 ‘청득여승상의지’ 승상의지 아부왈 ‘고황제약 “비유씨부득왕 비유공부득후. 불여약 천하공격지” 금신수황후형 무공 후지 비약야’ 경제묵연이지.
경제는 ‘승상과 상의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승상과 상의하자) 주아부는 ‘고제께서 맹약하시길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고, 공이 없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맹약대로 하지 않으면 천하가 모두 그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왕신이 황후의 오라비이긴 하지만 공이 없습니다. 그를 제후로 삼는다는 것은 맹약을 어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경제는 아무 말도 안하고 그 안건은 그로 그만이었다.
其後匈奴王[唯]徐盧等五人降, 景帝欲侯之以勧後. 丞相亜夫曰:「彼背其主降陛下, 陛下侯之, 則何以責人臣不守節者乎?」景帝曰:「丞相議不可用.」乃悉封[唯]徐盧等為列侯. 亜夫因謝病. 景帝中三年, 以病免相.
기후흉노왕유서로등오인항 경제욕후지이권후. 승상아부왈 ‘피배기주항폐하 폐하후지 즉하이책인신불수절자호’ 경제왈 ‘승상의불가용’ 내실봉유서로등위열후. 아부인사병. 셩제중삼년 이병면상.
그 뒤, 흉노 왕 유서로(唯徐盧) 등 다섯 사람이 항복해오자, 경제는 이들을 제후로 삼아 뒤에 남은 자들을 자극하려 했다. 승상 주아부는 ‘저들이 자신의 군주를 배반하고 폐하께 항복했는데 폐하께서 저들을 제후로 삼는다면 절개를 지키지 않는 신하들을 무슨 수로 나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경제는 ‘승상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군요.’라며 바로 유서로 등 모두를 제후로 삼았다. 이에 주아부는 병을 구실로 휴가를 청했고, 경제 중원 3년 병을 이유로 승상에서 면직시켰다.
頃之, 景帝居禁中, 召条侯, 賜食. 独置大胾, 無切肉, 又不置櫡. 条侯心不平, 顧謂尚席取櫡. 景帝視而笑曰:「此不足君所乎?」条侯免冠謝. 上起, 条侯因趨出. 景帝以目送之, 曰:「此怏怏者非少主臣也!」
경지 경제거금중 소조후 사식. 독치대자 무절육 우불치저. 조후심불평 고위상석취저, 경제시이소왈 ‘차부족군소호’ 조후면관사. 상기 조후인추출. 경제이목송지 왈 ‘차앙앙자비소주신야’
얼마 뒤 궁중에 있던 경제가 조후를 불러 먹을 것을 내리면서 큰 고기 덩어리 하나만 놓고는 잘게 썬 고기나 젓가락은 주지 않았다. 조후는 마음이 불편하여 고개를 돌려 술자리를 주관하는 상석(尙席)에게 젓가락을 가져오게 했다. 경제가 이를 보고는 웃으면서 ‘이 자리가 그대의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오?’라고 했다. 조후는 모자를 벗어 사죄했다. 주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후도 잰걸음으로 나가버렸다. 경제가 그가 나가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불만이 많은 자는 어린 군주의 신하가 될 수 없다!’라고 했다.
居無何, 条侯子為父買工官尚方甲楯五百被可以葬者. 取庸苦之, 不予銭. 庸知其盗買県官器, 怒而上変告子, 事連汚条侯.
거무하 조후자위부매공관상방갑순오백피가이장자. 취용고지 불여전. 용지기도매현관기 노이상변고자 사연오조후.
얼마 뒤, 조후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공관(工官)과 상방(尙方)에서 5백 건의 순장용 갑옷과 방패를 사들였다. 이것을 운반하는 고용인들이 힘들어 하자, 돈을 주지 않았다. 고용인들은 이 일이 나라의 기물을 몰래 사들인 것임을 알고는 화가 나서 조후의 아들을 위에다 고발했고, 일은 조후에까지 연루되었다.
書既聞上, 上下吏. 吏簿責条侯, 条侯不対. 景帝罵之曰:「吾不用也.」召詣廷尉.
서기문상 상하리. 리부책조후 조후불대. 경제매지왈 ‘오불용야’ 서지정위.
문서가 주상에게까지 전해지자 주상은 담당 관리에게 내려 보냈다. 관리가 문서로 조후에게 따졌으나 조후는 대꾸하지 않았다. 경제가 욕을 하며 ‘내 이는 간여치 않겠다!’라며 조서를 내려 정위에게 넘겼다.
廷尉責曰:「君侯欲反邪?」亜夫曰:「臣所買器, 乃葬器也, 何謂反邪?」吏曰:「君侯縦不反地上, 即欲反地下耳.」吏侵之益急. 初, 吏捕条侯, 条侯欲自殺, 夫人止之, 以故不得死, 遂入廷尉. 因不食五日, 嘔血而死. 国除.
정위책왈 ‘군후욕반사’ 아부왈 ‘신소먀지 냐장기야 하위반사’ 리왈 ‘군후종불반지상 즉욕반지하이’ 리침지익급. 초 리포조후 조후욕자살 부인지지 이고부득사 수입정위. 인불식오일 구혈이사. 국제.
정위가 ‘그대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소?’라고 문책했다. 주아부는 ‘신이 사들인 기물들은 순장품들인데 무슨 반란이란 말인가?’라고 했다. 관리가 ‘그대가 지상에서는 반란을 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지하에서 반란하려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관리의 다그침은 갈수록 심해졌다. 당초 관리가 조후를 체포했을 때 조후는 자살하려고 했으나 부인이 그를 말리는 바람에 죽지 못하고 정위에게 넘겨진 것이다. 이렇게 닷새 동안을 먹지 않다가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 봉국은 해체되었다.
絶一歳, 景帝乃更封絳侯勃他子堅為平曲侯, 続絳侯後. 十九年卒, 謚為共侯. 子建徳代侯, 十三年, 為太子太傅. 坐酎金不善, 元鼎五年, 有罪, 国除.
절일세 경제내경봉강후발타자견위평곡후 속상후후. 십구년졸 시위공후. 자건덕대후 십삼년 위태자태부. 좌주금불선 원정오년 유죄 국제.
봉국과 작위가 끊어진 지 일 년만에 경제는 강후 주발의 다른 아들인 주견(周堅)을 평곡후(平曲侯)로 봉해 강후의 뒤를 잇게 했다. 19년 뒤, 그가 죽자 공후(共侯)란 시호를 내렸다. 아들 주건덕(周建德)이 후작을 이었고, 13년 뒤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그가 바친 종묘 제사에 쓰는 주금(酎金)의 질이 나빠 원정(元鼎) 5년 죄를 받았고 나라는 해체되었다.
条侯果餓死. 死後, 景帝乃封王信為蓋侯.
조후과아사. 사후 경제내봉왕신위개후.
조후 주아부는 정말 굶어 죽었다. 죽은 뒤 경제는 왕신을 개후(蓋侯)에 봉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絳侯周勃始為布衣時, 鄙樸人也, 才能不過凡庸. 及従高祖定天下, 在将相位, 諸呂欲作亂, 勃匡国家難, 复之乎正. 雖伊尹、周公, 何以加哉! 亜夫之用兵, 持威重, 執堅刃, 穣苴曷有加焉! 足己而不学, 守節不遜, 終以窮困. 悲夫!
태사공왈 강후주발시위포의시 비복인야 재능불가범용. 급종고조정천하 재장상위 제여욕작란 발광국가난 복지호정. 수이윤 주공 하이가재 아부지용병 지위중 집견인 양저갈유가언 족기이불학 수절불손 종이궁곤. 비부.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강후 주발은 처음 평민이었을 때는 거칠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재능도 보통을 뛰어넘지 못했다. 고조를 따라 천하를 평정할 때 장상의 자리에 있었고, 여씨들이 난을 일으키려 하자, 주발은 나라를 난에서 구하고 제대로 되돌려 놓았다. 이윤(伊尹)이나 주공(周公)이라도 무엇을 더하겠는가? 주아부의 용병은 위엄이 넘치고 강인했으니 사마양저(司馬穰苴)라도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 만족하며 배우질 않고, 절개를 지켰지만 불손하여 끝내 곤궁에 처하고 말았으니 주아부를 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