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家- 留侯世家
<장량의 집안과 젊은 날의 행적>
留侯張良者, 其先韓人也. 大父開地, 相韓昭侯、宣恵王、襄哀王. 父平, 相釐王、悼恵王.
유후장량자 기선한인야. 대부개지 상한소후 선혜왕 양애왕. 부평 상리왕 도혜왕.
유후(留侯) 장량(張良)은 그 선조가 한(韓)나라 사람이다. 할아버지 개지(開地)는 한(韓)나라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애왕(襄哀王) 때 상을 지냈고, 아버지 평(平)은 희왕(釐王), 도혜왕(悼惠王) 때 상을 지냈다.
悼恵王二十三年, 平卒. 卒二十歳, 秦滅韓. 良年少, 未宦事韓. 韓破, 良家僮三百人, 弟死不葬, 悉以家財求客刺秦王, 為韓報仇, 以大父、父五世相韓故.
도혜왕이십삼년 평졸. 졸이십세 진멸한. 영연소 미환사한. 한차 양가동삼백인 제사불장 실이가재구객자진왕 위한보구 이대부 부오세상한고.
도혜왕 23년에 (아버지) 평이 죽었다. (평이) 죽은 지 20년 뒤 진(秦)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한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다. 한나라가 망할 즈음 장량의 집에는 노복이 300명이었다. 동생이 죽었지만 장례도 치르지 않고 집안의 재산을 모두 털어 자객을 구해 진왕을 찔러 한나라를 위해 복수하려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섯 임금에 걸쳐 한나라의 상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良嘗学礼淮陽. 東見倉海君. 得力士, 為鉄椎重百二十斤. 秦皇帝東游, 良與客狙撃秦皇帝博浪沙中, 誤中副車. 秦皇帝大怒, 大索天下, 求賊甚急, 為張良故也. 良乃更名姓, 亡匿下邳.
량상학예회양. 동견창해군. 득력사 위철추중백이십근. 진왕제동여 량여객저격진황제박랑사중 오중부거. 진황제대노 대색천하 구적심급 위장령고야. 량내경명성 망닉하비.
장량은 일찍이 회양(淮陽)에서 예(禮)를 배웠는데, 동방으로 가서 창해군(倉海君)을 만나 역사(力士)를 얻고 120근 나가는 철퇴를 만들었다. 진나라 황제(진시황)가 동쪽으로 순시를 나왔을 때 장량과 자객은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했으나 잘못하여 뒤따르는 수레를 맞추었다. 진시황은 크게 화가 나서 천하를 대대적으로 수색하며 자객을 아주 급하게 찾았는데 장량 때문이었다. 이에 장량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도망쳐 하비(下邳)에 숨었다.
良嘗閒従容歩游下邳圯上, 有一老父, 衣褐, 至良所, 直堕其履圯下, 顧謂良曰:「孺子, 下取履!」良鄂然, 欲殴之. 為其老, 彊忍, 下取履. 父曰:「履我!」良業為取履, 因長跪履之. 父以足受, 笑而去. 良殊大驚, 随目之. 父去里所, 复還, 曰:「孺子可教矣. 後五日平明, 與我会此.」
량상간종용보여하비이상 유일노부 위갈 지량소 직타기리이하 고위량왈 ‘유자 하취리’ 량악연 욕구지. 위기노 강인 하취리. 부왈 ‘리아’ 량업위취리 인장궤리지. 부이족수 소이거. 량수대경 수목지. 부거리소 복환 왈 ‘유자가교의. 후오일평명 여아회차’
장량이 한번은 조용히 하비의 이교(圯橋) 위를 거닐고 있었는데, 거친 삼베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자신의 신발을 다리 아래로 곧장 던져버리고는 장량을 돌아보며 ‘젊은이, 내려가 신발 좀 가져오지.’라고 했다. 장량이 황당해하며 때려주려 했으나 노인인지라 억지로 참고 내려가 신발을 가져왔다. 그러자 노인은 ‘나한테 신겨주게.’라고 했다. 장량은 이미 신발을 주워온 지라 무릎을 꿇고 신발을 신겼다. 노인은 발을 뻗어 신을 신고는 웃으며 가버렸다. 장량은 자못 놀랐고, 떠나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이 조금 가다가는 다시 돌아와 ‘가르칠 만한 젊은이로다. 닷새 뒤 새벽에 나와 여기서 만나자.’라고 했다.
良因怪之, 跪曰:「諾.」五日平明, 良往. 父已先在, 怒曰:「與老人期, 後, 何也?」去, 曰:「後五日早会.」五日雞鳴, 良往. 父又先在, 复怒曰:「後, 何也?」去, 曰:「後五日复早來.」五日, 良夜未半往.
량인괴지 궤왈 ‘락’ 오일평명 량왕. 부이선재 노왈 ‘여노인기 후하야’ 거 왈 ‘후오일조회’ 오일계명 량왕. 부우선재 복노왈 ‘후 하야’ 거 왈 ‘후오일복조래’ 오일 량야미반왕.
장량이 괴이하게 여기며 무릎을 꿇고는 ‘예’라고 답했다. 닷새 뒤 새벽, 장량이 그곳으로 갔더니 노인이 먼저 와 있다가 화를 내며 ‘늙은이와 약속해놓고 어째서 늦게 왔느냐’고 하더니 자리를 뜨면서 ‘닷새 뒤 더 일찍 만나자’라고 했다. 닷새 뒤 닭이 울 때 장량이 그곳으로 갔더니 노인 또 먼저 와 있다가 다시 화를 내며 ‘어째서 또 늦었느냐’고 한 다음 자리를 뜨면서 ‘닷새 뒤 더 일찍 오너라’라고 했다. 닷새 뒤 장량은 밤도 되기 전에 그곳으로 갔다.
有頃, 父亦來, 喜曰:「當如是.」出一編書, 曰:「読此則為王者師矣. 後十年興. 十三年孺子見我済北, 谷城山下黄石即我矣.」遂去, 無他言, 不复見. 旦日視其書, 乃太公兵法也. 良因異之, 常習誦読之.
유경 부역래 희왈 ‘당여시’ 줄일편서 왈 ‘독차즉위왕자사의. 후십년흥. 십삼년유자견아제북 곡성산하황석즉아의’ 수거 무타언 불복견. 단일시기서 내태공공볍야. 량인이지 상습송독지.
얼마 뒤 노인도 나타나서는 기분 좋게 ‘당연히 이래야지’라며 책 한 권을 내놓더니 ‘이것을 읽으면 왕의 스승이 될 것이다. 10년 후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13년 후에는 네가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의 누런 돌이 바로 나이니라’라 하고는 마침내 떠났는데 다른 말은 없었고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아 그 책을 보았더니 다름이 아닌 『태공병법(太公兵法)』이었다. 장량이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며 늘 읽고 공부했다.
居下邳, 為任侠. 項伯常殺人, 従良匿.
거하비 위입협. 항백상살인 종령닉.
하비에 머물 때는 협객을 자처했다. 항백(項伯)이 일찍이 사람을 죽이고는 장량을 따라 숨어 지냈다.
<유방을 보좌하여 진나라 항우를 멸하다>
後十年, 陳渉等起兵, 良亦聚少年百余人. 景駒自立為楚仮王, 在留. 良欲往従之, 道還沛公.
후십년 진섭등기병 량역취소년백여인. 경구자립위초가왕 재류. 량욕왕종지 도환패공.
10년 뒤(기원전 209) 진섭(陳涉) 등이 봉기하자 장량 역시 젊은이 100여 명을 모았다. 경구(景駒)가 자립하여 초나라의 임시 왕이 되어 유현(留縣)에 있었다. 장량이 가서 그를 따르려 하다가 가는 길에 패공을 만났다.
沛公将數千人, 略地下邳西, 遂属焉. 沛公拝良為厩将. 良數以太公兵法説沛公, 沛公善之, 常用其策. 良為他人者, 皆不省. 良曰:「沛公殆天授.」故遂従之, 不去見景駒.
패공장수천인 략지하비서 수속언. 패공배량위구장. 양수이태공병법설패공 패공선지 상용기책. 양위타인지자 개불성. 량왈 ‘패공시천수’ 고수종지 불거견경구.
패공은 수천 명을 거느리고 하비 서쪽 땅을 공격하여 마침내 복속시켰다. 패공은 장량에게 구장(廐將) 벼슬을 주었다. 장량이 수시로 『태공병법』으로 패공에게 유세하자 패공이 이를 좋아하여 늘 그 계책을 사용했다. 장량은 다른 사람에게도 같이 했지만 모두 깨닫지 못했다. 장량은 ‘패공은 거의 하늘이 내리신 분이다’라고 했다. 이에 마침내 패공을 따르면서 경구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及沛公之薛, 見項梁. 項梁立楚懐王. 良乃説項梁曰:「君已立楚後, 而韓諸公子横陽君成賢, 可立為王, 益樹党.」項梁使良求韓成, 立以為韓王. 以良為韓申徒, 與韓王将千余人西略韓地, 得數城, 秦輒复取之, 往來為游兵潁川.
급패공지설 견항량. 항량립초회왕. 량내설항량왈 ‘군이립초후 이한제공자횡양군성현 가립위왕 익수당’ 항량사량구한성 립이위한왕. 이량위한신도 여한왕장천여인서략한지 득수성 진첩복취지 왕래위유병영천.
패공이 설읍(薛邑)으로 가서 항량(項梁)을 만났다. 항량은 초나라 회왕(懷王)을 옹립했다. 장량이 이에 항량에게 ‘군께서 이미 초나라 후예를 세우셨으니 한(韓)나라의 여러 공자들 중 횡양군(橫陽君) 한성(韓成)이 어질다 하니 왕으로 세워 함께 할 세력을 늘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유세했다. 항량은 장량에게 한성을 찾아 한왕으로 세우는 한편, 장량을 한(韓)나라 사도(司徒)로 삼아 한왕과 함께 천 여 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한나라의 땅을 공략하게 하여 여러 개의 성을 얻었으나 진나라가 금세 다시 빼앗는 등 영천(潁川)을 오가며 유격전을 벌였다.
沛公之従雒陽南出轘轅, 良引兵従沛公, 下韓十余城, 撃破楊熊軍. 沛公乃令韓王成留守陽翟, 與良倶南, 攻下宛, 西入武関. 沛公欲以兵二萬人撃秦嶢下軍.
패공지종락양남출환원 량인병종패공 하한십여성 격차양웅군. 패공내영한왕성류수양적 여량구남 공하완 서입무관. 패공욕이병이만인격진요하군.
패공이 낙양(雒陽)에서 남으로 환원(轘轅)으로 출격하자 장량은 병사를 이끌고 패공을 따라 한나라의 1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양웅(楊熊)의 군대를 격파했다. 패공은 이에 한왕(韓王) 한성에게 남아서 양책(陽翟)을 지키게 하고는 장량과 함께 남하해서 완(宛)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서쪽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패공이 병사 2만으로 진나라의 요관(嶢關) 군대를 공격하려고 했다.
良説曰:「秦兵尚彊, 未可軽. 臣聞其将屠者子, 賈豎易動以利. 願沛公且留壁, 使人先行, 為五萬人具食, 益為張旗幟諸山上, 為疑兵, 令酈食其持重宝啗秦将.」
량설왈 ‘진병상강 미가경. 신문기장도자자 고수이동이리. 원패공차류벽 사인선행 위오만인구식 익위장기치제산상 위의병 영역이기지중보담진장’
장량은 ‘진나라의 병력이 아직 강하여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신이 듣기에 장수는 백정의 자식이라 하고 장사치로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더이다. 원컨대 패공께서는 잠시 멈추어 군영을 정비하십시오. 사람을 먼저 보내 5만 명이 먹을 식사를 준비시키고, 산마다에 깃발을 더 꽂아 의병(疑兵: 가짜 군사)처럼 위장하고, 역이기(酈食其)에게 넉넉하게 재물을 딸려 보내 진나라의 장수를 매수하게 하십시오.’라고 건의했다.
秦将果畔, 欲連和倶西襲咸陽, 沛公欲聴之. 良曰:「此独其将欲叛耳, 恐士卒不従. 不従必危, 不如因其解撃之.」沛公乃引兵撃秦軍, 大破之. 遂北至藍田, 再戦, 秦兵竟敗. 遂至咸陽, 秦王子嬰降沛公.
진장과반 욕연화구서습함양 패공욕청지. 량왈 ‘차독기장욕반이 공사졸부종. 부종필위 불려인기해격지’ 패공내인병격진군 대파지. 수북지람전 재전 진병경패 수지함양 진왕자영항패공.
진나라의 장수가 과연 배반하여 (패공과) 연합하여 함께 서쪽으로 함양을 치자고 했다. 패공이 이 말을 들으려 하자 장량은 ‘이는 그 장수 혼자만의 배반이지 병졸이 따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따르지 않는다면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해이해지면 공격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건의했다. 패공이 이에 병사들을 이끌고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여 대파한 다음 북으로 남전(藍田)에 이르러 다시 싸우니 진나라의 군대가 결국 패배했다. 마침내 함양에 이르니 진나라 왕 자영(子嬰: 진시황의 아들)이 패공에게 항복했다.
沛公入秦宮, 宮室帷帳狗馬重宝婦女以千數, 意欲留居之. 樊噲諫沛公出舎, 沛公不聴. 良曰:「夫秦為無道, 故沛公得至此. 夫為天下除残賊, 宜縞素為資. 今始入秦, 即安其樂, 此所謂『助桀為虐』. 且『忠言逆耳利於行, 毒薬苦口利於病』, 願沛公聴樊噲言.」
패공입진궁 궁실휘장구마중보부녀이천수 의욕유거지. 번쾌간패공출사 패공불청. 량왈 ‘부진위무도 고패공득지차. 부위천하제잔적 의고소위자. 금시입진 즉안기악 차소위 “조걸위학”. 차 “충언역이리어행 독약고구리어병” 원패공청번쾌언’
패공은 진나라의 궁으로 들어가서 엄청난 궁실, 휘장, 개, 말, 귀한 보물, 여자를 보고는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다. 번쾌(樊噲)가 패공에게 궁궐 밖으로 나가자고 간했으나 패공은 듣지 않았다. 이에 장량이 ‘무릇 진나라가 무도했기 때문에 패공께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대저 천하를 위해 남은 도적들을 없애려면 검소한 것이 밑천입니다. 지금 진나라에 들어오자마자 쾌락에 몸을 맡긴다면 이런 것을 “걸을 도와 포악한 짓을 저지른다”고 합니다. 또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유익하고,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좋다”고 합니다. 원컨대 패공께서는 번쾌의 말을 들으십시오’라고 했다.
沛公乃還軍霸上.
패공내환군패상.
패공이 바로 군대를 패상(霸上)으로 돌렸다.
項羽至鴻門下, 欲撃沛公, 項伯乃夜馳入沛公軍, 私見張良, 欲與倶去. 良曰:「臣為韓王送沛公, 今事有急, 亡去不義.」乃具以語沛公. 沛公大驚, 曰:「為将柰何?」良曰:「沛公誠欲倍項羽邪?」沛公曰:「鯫生教我距関無内諸侯, 秦地可尽王, 故聴之.」
항우지홍문하 욕격패공 항백내야치입패공군 사견장량 욕여구거. 량왈 ‘신위한공송패공 금사유급 망거불의’ 냐구이어패공. 패공대경 왈 ‘위장내하’ 량왈 ‘패공성욕배항우아’ 패공왈 ‘추생교아걱한무내제후 진지가진왕 고청지’
항우가 홍문(鴻門) 아래에 이르러 패공을 공격하려고 하자, 항백이 밤중에 바로 패공의 군영으로 달려가 사사로이 장량을 만나 함께 떠나려고 했다. 장량이 ‘신은 한왕(韓王)을 위해 패공을 따르고 있소. 지금 사태가 급하다고 도망가 버리는 것은 의리가 아니오.’라 하고는 바로 패공에게 모든 것을 알렸다. 패공이 크게 놀라며 ‘어떻게 하면 되겠소?’라 했다. 장량이 ‘패공께서는 정말 항우를 배반할 작정이십니까?’라고 물었다. 패공은 ‘뭐도 모르는 조무래기들이 내게 함곡관을 막고 제후들을 들이지 않으면 진나라의 땅이 모두 왕의 차지가 된다고 하길래, 내가 그 말을 따랐지’라고 했다.
良曰:「沛公自度能卻項羽乎?」沛公黙然良久, 曰:「固不能也. 今為柰何?」良乃固要項伯. 項伯見沛公. 沛公與飲為寿, 結賓婚. 令項伯具言沛公不敢倍項羽, 所以距関者, 備他盗也. 及見項羽後解, 語在項羽事中.
량왈 ‘패공자도능각항우호’ 패공묵연량구 왈 ‘고불능야 금위내하’ 량내고요항백. 항백견패공. 패공여음위수 결빈혼. 영항백구언패공불감배항우 소이거관자 비타도야. 급견항우후해 어재항우사중.
장량이 ‘패공께서 스스로 헤아려 보시기에 항우를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패공은 한참 말이 없다가 ‘못하지. 그러니 지금 어찌 하면 되겠나?’라고 했다. 장량은 이에 한사코 항백을 만나게 했다. 항백은 패공을 만났다. 패공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건강과 장수를 빌어 친구 사이가 되는 한편 혼사를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항백으로 하여금 (항우에게) 패공이 항우를 배반하지 않을 것과 그래서 함곡관을 지킨 것은 다른 도적을 막기 위한 것이었음을 다 말하게 했다. 이어 항우를 만난 다음 화해한 이야기는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있다.
<건국 후 장량의 행적>
漢元年正月, 沛公為漢王, 王巴蜀. 漢王賜良金百溢, 珠二斗, 良具以献項伯.
한원년정월 패공위한왕 왕파촉. 한왕사량금백일 주이두 량구이헌항백.
한(漢)나라 원년(기원전 206년) 정월, 패공은 한왕(漢王)으로 파(巴), 촉(蜀)의 왕이 되었다. 한왕은 장량에게 황금 1백 일(溢: 1되의 24분의 1. 무게로 20량(兩).)과 구슬 2말을 하사했지만 장량은 모두 항백에서 갖다 주었다.
漢王亦因令良厚遺項伯, 使請漢中地. 項王乃許之, 遂得漢中地. 漢王之国, 良送至褒中, 遣良帰韓. 良因説漢王曰:「王何不焼絶所過桟道, 示天下無還心, 以固項王意.」乃使良還. 行, 焼絶桟道.
한왕역인영량후유항뱍 사청한중지. 항왕내허지 수득한중지. 한왕지국 량송지포중 견량귀한. 량인설한왕왈 ‘왕하불소적소과잔도 시천하무환심 이고항왕의’ 내사량환. 행 소절잔도.
한왕은 또 장량으로 하여금 후한 예물을 항백에게 갖다 주게 하면서 한중의 땅을 부탁하게 했다. 항왕이 이를 허락하니 마침내 한중의 땅을 얻었다. 한왕은 봉국으로 가게 되었고, 장량은 포중(褒中)에 이르러 (한왕을) 떠나보냈고, (한왕은) 장량을 한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장량은 한왕에게 ‘왕께서는 어째서 지나온 곳의 잔도(棧道)를 태워 끊어서 천하를 향해 돌아올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항왕의 마음을 단도리 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장량을 돌려보내고, 지나온 잔도를 불태워 끊어버렸다.
良至韓, 韓王成以良従漢王故, 項王不遣成之国, 従與倶東. 良説項王曰:「漢王焼絶桟道, 無還心矣.」乃以斉王田栄反, 書告項王. 項王以此無西憂漢心, 而発兵北撃斉.
량지한 한왕성이량종한왕고 항왕불견성지국 종여구동. 량설항왕왈 ‘한왕소절잔도 무환시믜’ 내이제왕전영반 서고항왕. 항왕이차무서우한심 이발병북격제.
장량이 한에 이르자 항왕은 장량이 한왕을 따랐다는 이유로 한왕 성(成)을 나라로 보내지 않고 자신을 따라 함께 동쪽으로 가게 했다. 장량은 항왕에게 ‘한왕이 잔도를 태워 끊어버렸다는 것은 돌아올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또 제왕(齊王) 전영(田榮)의 모반을 항왕에게 글로 알렸다. 항왕이 이 때문에 서쪽으로 한에 대한 걱정을 덜고 군대를 징발하여 북으로 제나라를 쳤다.
項王竟不肯遣韓王, 乃以為侯, 又殺之彭城. 良亡, 閒行帰漢王, 漢王亦已還定三秦矣. 复以良為成信侯, 従東撃楚.
항왕경불긍견한왕 내이위후 우살지팽성. 량망 간행귀한왕 한왕역이환정삼진의. 복이량위성신후 종동격초.
그러나 항왕은 한왕을 기어코 돌려보내지 않고 후(侯)로 봉했다가 팽성(彭城)에서 죽여 버렸다. 장량은 달아나서 샛길로 한왕에게 돌아갔다. 한왕 역시 (관중으로) 돌아와 삼진(三秦)을 평정한 뒤였다. (한왕은) 다시 장량을 성신후(成信侯)로 봉하고 동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는데 따르게 했다.
至彭城, 漢敗而還. 至下邑, 漢王下馬踞鞍而問曰:「吾欲捐関以東等棄之, 誰可與共功者?」良進曰:「九江王黥布, 楚梟将, 與項王有郄;彭越與斉王田栄反梁地:此両人可急使. 而漢王之将独韓信可属大事, 當一面. 即欲捐之, 捐之此三人, 則楚可破也.」
지팽성 한패이환. 지하읍 한왕하마거안이문왈 ‘오욕손관이동등기지 수가여공공자’ 량진왈 ‘구강왕경포 초효장 여항왕유극 팽월여제왕전영반양지 차양인가급사. 이한왕지장독한신가속대사 당일면, 즉욕손지 손지차삼인 즉초가파야’
팽성에 이르러 한나라는 패하여 돌아오게 되었다. 하읍(下邑)에 이르자 한왕은 말에서 내려 말안장에 기댄 채 ‘내가 함곡관 동쪽을 전부 포기한다면 누구와 함께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장량이 나서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는 초나라의 용맹한 장수였으나 항왕과 틈이 벌어져 있고, 팽월은 제왕 전영과 양(梁)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두 사람은 급할 때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왕의 장수로는 오직 한신(韓信)이 큰일을 주면 한 방면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을 포기하실 경우 이 세 사람에게 주면 초나라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漢王乃遣随何説九江王布, 而使人連彭越. 及魏王豹反, 使韓信将兵撃之, 因挙燕、代、斉、趙. 然卒破楚者, 此三人力也.
한왕내견수하설구강왕포 이사인연팽월. 급위왕표반 사한신장병격지 인거연 대 제 조 연졸파초자 차삼인역야.
한왕이 이에 수하(隧何)를 보내어 구강왕 경포를 설득하게 하고, 사람을 보내 팽월과도 연합했다. 이윽고 위왕(魏王) 표(豹)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신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를 치게 했고, 이에 연, 대(代), 제, 조를 모두 함락시켰다. 결국 초나라를 격파했는데, 이 세 사람의 힘이었다.
張良多病, 未嘗特将也, 常為畫策, 時時従漢王.
장량다병 미상특장야 상인화책 시시종한왕.
장량은 병이 많아 혼자 군대를 이끈 적은 없고, 늘 계책을 내면서 늘 한왕을 따랐다.
漢三年, 項羽急囲漢王滎陽, 漢王恐憂, 與酈食其謀橈楚権.
한삼년 항우급위한왕형양 한왕공우 여역여기모뇨초권.
한 3년에 항우가 급히 한왕을 형양(滎陽)에서 포위했다. 한왕이 겁이 나고 걱정이 되어서 역이기와 초나라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계책을 모의했다.
食其曰:「昔湯伐桀, 封其後於杞. 武王伐紂, 封其後於宋. 今秦失徳棄義, 侵伐諸侯社稷, 滅六国之後, 使無立錐之地. 陛下誠能复立六国後世, 畢已受印, 此其君臣百姓必皆戴陛下之徳, 莫不郷風慕義, 願為臣妾. 徳義已行, 陛下南郷称霸, 楚必斂衽而朝.」
여기왈 ;석탕벌걸 봉기후어기. 무왕벌주 봉기후어송. 금진실덕기의 침벌제후사직 멸욱국지후 사무립추지지. 폐하성능복립육국후세 필이수인 차기군신백성필개대폐하지덕 막불향풍모의 원위신첩. 덕의이행 폐하남향칭패 초필렴임이조.
역이기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탕(湯)임금은 걸(桀)을 토벌하고 그 후손을 기(杞)에 봉했고, 무왕(武王)은 주(紂)를 치고 그 후손을 송(宋)에 봉했습니다. 지금 진나라가 덕을 잃고 의를 버린 채 제후의 사직을 침략하여 6국의 후손을 끊어 송곳 하나 세울 땅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진정으로 6국의 후세들을 다시 세워 그들의 도장을 다 돌려줄 수 있다면 군신과 백성들 모두 폐하의 덕에 감격하여 폐하의 풍모와 의리를 흠모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며, 기꺼이 신첩이 되길 원할 것입니다. 덕과 의리가 시행되어 폐하께서 남면하여 패자로 칭하시면 초나라는 틀림없이 옷깃을 여미고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漢王曰:「善. 趣刻印, 先生因行佩之矣.」
한왕왈 ‘선 취각인 선생인행패지의’
한왕은 ‘좋소! 서둘러 도장을 새기게 하고, 선생이 그것을 가지고 떠나시오!’라고 했다.
食其未行, 張良従外來謁. 漢王方食, 曰:「子房前! 客有為我計橈楚権者.」其以酈生語告, 曰:「於子房何如?」良曰:「誰為陛下畫此計者? 陛下事去矣.」漢王曰:「何哉?」張良対曰:「臣請藉前箸為大王籌之.」
이기미행 장량종외래알. 한왕방식 왈 ‘자방전 객우위아계녀초권자’ 기이역생어고 왈 ‘어자방하여’ 량왈 ‘수위폐하화차계자 폐하사거의’ 한왕왈 ‘하재’ 장량대왈 ‘신청자전저위대왕주지’
역이기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데 장량이 밖에서 돌아와 인사를 드렸다. 한왕이 마침 식사를 하고 ‘자방(子房), 이리 오시오. 나를 위해 초나라의 위세를 약하게 만들 계책을 낸 식객이 있었소.’라 하고는 역생(역이기)의 말을 일러준 다음 ‘자방이 보기에는 어떻소?’라고 물었다. 장량은 ‘누가 폐하께 그런 계책을 냈습니까? 폐하의 모든 일은 끝장납니다.’라고 했다. 한왕이 ‘어째서?’라고 하자 장량은 ‘그 앞의 젓가락을 빌려 대왕을 위해 한번 따져보게 해주십시오.’라 하고는
曰:「昔者湯伐桀而封其後於杞者, 度能制桀之死命也. 今陛下能制項籍之死命乎?」曰:「未能也.」
왈 ‘석자탕벌걸이봉기후어기자 도능제걸지사명야. 금폐하능제항적지사명호’ 왈 ‘미능야’
이렇게 말했다. ‘옛날 탕임금이 걸을 토벌하고 그 후손을 기에 봉한 것은 걸의 목숨을 통제할 수 있다고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항적의 목숨을 통제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지.’
「其不可一也. 武王伐紂封其後於宋者, 度能得紂之頭也. 今陛下能得項籍之頭乎?」曰:「未能也.」
‘기불가일야 무왕벌주봉기후어송자 도능득봉지두야. 금폐하능득항적지두호’ 왈 ‘미능야’
‘이것이 첫 번째 안 되는 이유입니다. 무왕이 주를 치고 그 후손을 송에 봉한 것은 주의 머리를 얻을 수 있다고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항적의 머리를 얻을 수 있습니까?’ ‘못하지.’
「其不可二也. 武王入殷, 表商容之閭, 釈箕子之拘, 封比干之墓. 今陛下能封聖人之墓, 表賢者之閭, 式智者之門乎?」曰:「未能也.」
‘기불가이야. 무왕입은 표상용지려 석기자지구 봉차간지묘. 금폐하능봉성인지묘 표현자지여 식지자지문호’ 왈 ‘미능야’
‘이것이 두 번째 안 되는 이유입니다. 무왕이 은에 들어가서 상용(商容)의 마을에다 상용을 표창하고, 구속되어 있는 기자(箕子)를 풀어주고, 비간(比干) 무덤에 봉토를 덮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성인의 무덤에 흙을 봉토를 덮거나, 현자와 마을을 표창하거나, 지자의 집 문 앞에 내려 인사를 드릴 수 있습니까?’ ‘못하지.’
「其不可三也. 発鉅橋之粟, 散鹿台之銭, 以賜貧窮. 今陛下能散府庫以賜貧窮乎?」曰:「未能也.」
‘기불가삼야 발거교지속 산록대지전 이사빈궁. 금폐하능산부고이사빈궁호’ 왈 ‘미능야’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무왕은) 거교(鉅橋)와 녹대(鹿臺)의 곡식과 돈을 풀어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창고를 열어 돈과 식량을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실 수 있습니까?’ ‘못하지.’
「其不可四矣. 殷事已畢, 偃革為軒, 倒置干戈, 覆以虎皮, 以示天下不复用兵. 今陛下能偃武行文, 不复用兵乎?」曰:「未能也.」
“기불가사의. 은사이필 안혁이헌 도치간과 복이호피 이시천하불복용병. 금폐하능언무행문 불복용병호‘ 왈 ’미능야‘
‘이것이 네 번째 안 되는 까닭입니다. 은의 일이 끝나자 (무왕은) 전차를 일반 수레로 바꾸고, 무기를 창고에 넣고 호랑이 가죽을 덮음으로써 다시는 군대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천하에 보여주었습니다. 폐하께서 지금 무력을 버리고 문치를 시행하며 더는 군대를 사용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못하지.’
「其不可五矣. 休馬華山之陽, 示以無所為. 今陛下能休馬無所用乎?」曰:「未能也.」
‘기불가오의. 휴마화산지양 시이무소위. 금폐하능휴마무소용호’ 왈 ‘미능야’
‘이것이 다섯 번째 안 되는 까닭입니다. (무왕은 전쟁 때 동원되었던) 말들을 화산(華山) 남쪽에 풀어놓고 쉬게 하여 더는 동원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말을 동원하지 않고 쉬게 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
「其不可六矣. 放牛桃林之陰, 以示不复輸積. 今陛下能放牛不复輸積乎?」曰:「未能也.」
‘기불가육의. 방우도립지음 이시불복수적. 금폐하능방생불복수적호’ 왈 ‘미능야’
‘이것이 여섯 번째 안 되는 까닭입니다. (무왕은 군용 물자를 운반하는) 소를 도림(桃林) 북쪽에 풀어놓음으로써 다시는 군대 물자 운수에 쓰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다시는 군대 물자를 운반하지 않게 소를 풀어 놓으실 수 있습니까?’ ‘못하지.’
「其不可七矣. 且天下游士離其親戚, 棄墳墓, 去故旧, 従陛下游者, 徒欲日夜望咫尺之地. 今复六国, 立韓、魏、燕、趙、斉、楚之後, 天下游士各帰事其主, 従其親戚, 反其故旧墳墓, 陛下與誰取天下乎? 其不可八矣. 且夫楚唯無彊, 六国立者复橈而従之, 陛下焉得而臣之? 誠用客之謀, 陛下事去矣.」
‘기불가칠의. 차천하유사리기친척 기분묘 거고구 종폐하유자 도욕일야망지척지지. 금복육국 립한 위 연 조 제 초지후 천하유사각귀사기주 종기친척 반기고구분묘 폐하여수취천하호 기불가팔의. 차부초유무강 육국립자복뇨이종지 폐하언득이신지 성용객지모 폐하사거의’
‘이것이 일곱 번째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천하의 유세가들이 그 친척을 떠나 조상의 무덤을 내팽개치고 고향을 버린 채 폐하를 따라 떠도는 것은 그저 낮밤으로 한 자 한 치의 땅이라도 얻기를 바라서입니다. 지금 6국을 복구하여 한(韓), 위(魏), 연(燕), 조(趙), 제(齊), 초(楚)나라의 후손을 세우면 천하의 유세가들은 각자 돌아가 그 주인을 섬기면서 그 친척을 따르고 다시 조상 무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데, 폐하께서는 누구와 함께 천하를 취하시렵니까? 이것이 여덟 번째 안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초나라가 유일한 강자로서 6국이 나라를 회복하면 초나라가 다시 그들을 굴복시켜 따르게 할 터인데 폐하께서 (초나라를) 신하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 식객의 계책을 정말 채용하신다면 폐하의 일은 끝장입니다.’
漢王輟食吐哺, 罵曰:「豎儒, 幾敗而公事!」令趣銷印.
한왕철식토포 매왈 ‘수유 기패이공사’ 영취소인.
한왕이 먹던 음식을 뱉어내면서 '이런 유생놈 때문에 하마터면 큰일을 망하게 만들 뻔했군!'라고 욕을 하고는 도장을 녹이게 했다.
漢四年, 韓信破斉而欲自立為斉王, 漢王怒. 張良説漢王, 漢王使良授斉王信印, 語在淮陰事中.
한사년 한신파제이욕자립위제왕 한왕노. 장량설한왕 한왕사량수재왕신인 어재회음사중.
한 4년에 한신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제왕이 되려고 하자, 한왕이 노했다. 장량이 한왕을 설득하자 한왕은 장량을 시켜 한신에게 제왕의 도장을 주었다. 이 일은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있다.
其秋, 漢王追楚至陽夏南, 戦不利而壁固陵, 諸侯期不至. 良説漢王, 漢王用其計, 諸侯皆至. 語在項籍事中.
기추 한왕추초지양하남 전불리이벽고릉 제후기부지. 량설한왕 한왕용기계 제후개지. 어재항적사중.
그해 가을에 한왕은 초나라를 뒤쫓아 양하(陽夏) 남쪽에 이르렀으나 전세가 불리해 고릉(固陵)에 보루를 쌓았다. 제후들이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자 장량이 한왕을 설득하여 한왕이 그 계책을 쓰자 제후들이 모두 왔다. 이 일은 「항우본기」에 있다.
漢六年正月, 封功臣. 良未嘗有戦鬥功, 高帝曰:「運籌策帷帳中, 決勝千里外, 子房功也. 自択斉三萬戸.」良曰:「始臣起下邳, 與上会留, 此天以臣授陛下. 陛下用臣計, 幸而時中, 臣願封留足矣, 不敢當三萬戸.」
한육년정월 봉공신. 량미상유전투공 고제왈 ‘운주책휘장중 결승천리외 자방공야. 자택제삼만호’ 량왈 ‘시신기하비 여상회류 차천이신수폐하. 폐하용신계 행이시중 신원봉유족의 불감당삼만호’
한 6년 정월에 공신들을 봉했다. 장량이 전투에서는 공이 없었지만 고제는 ‘장막 안에서 계책을 운용하여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지은 것은 자방의 공이다. 알아서 제나라 3만 호를 고르라!’라고 했다. 장량은 ‘처음 신이 하비(下邳)에서 일어나 주상과 유(留)에서 만났는데,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께 주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의 계책을 쓰셨고, 다행히 시기가 맞았습니다. 신은 유후(留侯)에 봉해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3만 호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乃封張良為留侯, 與蕭何等倶封.
내봉장량위유후 여소하등구봉.
이에 장량을 유후에 봉했는데 소하(蕭何) 등과 함께 봉해졌다.
(六年)上已封大功臣二十余人, 其余日夜争功不決, 未得行封.
육년 상이봉대공신이십여인 기여일야쟁공불결 미득행봉.
주상이 주요 공신 20여 명은 봉했지만 그 나머지는 낮밤으로 공을 다투는 바람에 결정을 못해 봉하지 못하고 있었다.
上在雒陽南宮, 従复道望見諸将往往相與坐沙中語. 上曰:「此何語?」留侯曰:「陛下不知乎? 此謀反耳.」上曰:「天下属安定, 何故反乎?」留侯曰:「陛下起布衣, 以此属取天下, 今陛下為天子, 而所封皆蕭、曹故人所親愛, 而所誅者皆生平所仇怨. 今軍吏計功, 以天下不足遍封, 此属畏陛下不能尽封, 恐又見疑平生過失及誅, 故即相聚謀反耳.」
상재낙양남궁 졸복고망견제장왕왕상여좌사중어. 상왈 ‘차하어’ 유후왈 ‘폐하부지호 차모반이’ 상왈 ‘천하속안정 하고반호’ 유후왈 ‘폐하기포의 이차속취천하 금폐하위천자 이소봉개소 조고인소친애 이소주자개생평소구원. 금군리계공 이천하부족편봉 차속외폐하불능진봉 공우견의평생과실급주 고즉상취모반이’
주상이 낙양의 남궁(南宮) 복도 위에서 장수들이 무리를 지어 모래판에 앉아서 숙덕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저들이 무슨 말들을 하는가?’라고 물었다. 유후가 ‘폐하께서 모르고 계십니까? 저들이 반란을 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주상이 ‘천하가 막 안정을 찾았는데 무엇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단 말이오?’라고 했다. 유후가 ‘폐하께서 평민의 신분으로 봉기하시어 저들을 데리고 천하를 취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천자가 되시어 봉한 자들이라고는 모두 소하, 조참 같은 아끼고 친한 친구들이고, 죽인 자들은 모두 평소 원한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군의 관리들이 공을 따져보니 천하로도 다 봉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폐하께서 다 봉해주지 못할까 두렵고, 또 평소의 잘못 때문에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서로 모여 반란을 꾀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上乃憂曰:「為之柰何?」留侯曰:「上平生所憎, 群臣所共知, 誰最甚者?」上曰:「雍歯與我故, 數嘗窘辱我. 我欲殺之, 為其功多, 故不忍.」留侯曰:「今急先封雍歯以示群臣, 群臣見雍歯封, 則人人自堅矣.」於是上乃置酒, 封雍歯為什方侯, 而急趣丞相、御史定功行封. 群臣罷酒, 皆喜曰:「雍歯尚為侯, 我属無患矣.」
상내우왈 ‘위지내하’ 유후왈 ‘상평생소증 군신소공지 추최심자’ 상왈 ‘옹치여아고 수상군욕아. 아욕살지 위기공다 고불인’ 유후왈 ‘금급선봉옹치이시군신 군신견옹치봉 즉인인자견의’ 어시상내치주 봉옹치위십방후 이급취승강 어사정공행봉. 군신파주 개희왈 ‘옹치상위후 아속무환의’
주상이 걱정이 되어 ‘이를 어찌하면 되겠소?’라고 하자 유후는 ‘주상께서 평소 미워하는 자로서 신하들이 다 알고 있고 또 가장 심한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주상이 ‘옹치(雍齒)가 나와 묵은 감정이 있지. 여러 차례 나를 곤욕스럽게 만든 적이 있어 내가 그를 죽이려 했지만 세운 공이 많아 차마 못했지.’라고 했다. 유후는 ‘지금 바로 옹치를 먼저 봉해 신하들에게 보이도록 하십시오. 신하들이 옹치가 봉해지는 것을 보면 알아서 마음을 잡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주상은 바로 술자리를 마련하여 옹치를 십방후(什方侯)에 봉하는 한편 급히 승상과 어사를 재촉해 논공행상을 시행하도록 했다. 신하들은 술자리가 끝나자 모두들 ‘옹치조차 봉해졌으니 우리들은 걱정할 것 없다.’며 기뻐했다.
劉敬説高帝曰:「都関中.」上疑之. 左右大臣皆山東人, 多勧上都雒陽:「雒陽東有成皐, 西有殽黽, 倍河, 向伊雒, 其固亦足恃.」
유경설고제왈 ‘도관중’ 상의지. 좌우대신개산동인 다권상도락양 ‘락영동유성고 서유효만 배하 내이락 기고역부시’
유경(劉敬)이 고제에게 ‘관중(關中)에 도읍하십시오.’라고 했으나 주상은 좌우 대신들이 모두 산동 사람들이라 대부분 낙양에 도읍할 것을 권하면서 ‘낙양 동쪽에는 성고(成皐)가 있고, 서쪽에는 효산(崤山), 민지(澠池)가 있으며, 황하를 등지고 이수(伊水)와 낙수(雒水)를 마주하고 있어 그 견고함이 충분히 믿을 만합니다.’라고 했기에 관중 도읍을 마뜩치 않아했다.
留侯曰:「雒陽雖有此固, 其中小, 不過數百里, 田地薄, 四面受敵, 此非用武之国也. 夫関中左殽函, 右隴蜀, 沃野千里, 南有巴蜀之饒, 北有胡苑之利, 阻三面而守, 独以一面東制諸侯. 諸侯安定, 河渭漕輓天下, 西給京師;諸侯有変, 順流而下, 足以委輸. 此所謂金城千里, 天府之国也, 劉敬説是也.」
유후왈 ‘낙양수유차고 기중심 불과수백리 전지박 사면수적 차비용무지국야. 부관중좌효함 우롱촉 옥야천리 남유파촉지요 북유호원지리 저삼면이수 독이일면동재제후. 제후안정 하위조만천하 서급경사 제후유변 순류이하 족이위수. 차소위금성천히 천부지국야 유경설시야’
이에 유후는 이렇게 말했다. ‘낙양이 비록 그런 견고함이 있기는 하지만 그 중심은 작아 수백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땅은 척박하고 사면으로 적을 상대해야 하니 싸움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저 관중은 동쪽으로 효산과 함곡관이 있고, 서쪽으로 농산(隴山)과 촉산(蜀山)이 있습니다. 기름진 땅이 천 리이고, 남으로 파와 촉의 풍요로움이 있으며, 북으로 흉노 등 초원의 이점이 있습니다. 삼면이 막혀있어 지키기로 한다면 동쪽 한 쪽만 가지고도 제후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제후들이 안정되면 황하와 위수로 천하에 식량을 운송하여 서쪽으로 도읍에 공급할 수 있습니다. 제후들이 변란을 일으키면 물길을 따라 내려와 충분히 물자를 운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금성천리(金城千里)”이자 “천부지국(天府之國)”입니다. 유경의 말이 옳습니다.‘
於是高帝即日駕, 西都関中. 留侯従入関. 留侯性多病, 即道引不食谷, 杜門不出歳余.
어시고재즉일가 서도관중. 유후종입관. 유후성다병 즉도인불식곡 두문불출세여.
이에 고제는 바로 그 날로 수레를 몰아 서쪽 관중에다 도읍했다. 유후도 따라서 관중으로 들어갔다. 유후는 천성적으로 병이 많아 도인술(導引術)을 하면서 곡기를 끊고 1년 넘게 문을 나오지 않았다.
上欲廃太子, 立戚夫人子趙王如意. 大臣多諫争, 未能得堅決者也. 呂后恐, 不知所為.
상욕폐태자 립척부인자조왕여의. 대신다간쟁 미능득견결자야. 여후공 부지소위.
주상이 태자를 폐위시키고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세우고자 했다. 대신들 대부분이 서로 간언했지만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후(呂后)가 두려워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人或謂呂后曰:「留侯善畫計筴, 上信用之.」呂后乃使建成侯呂沢劫留侯, 曰:「君常為上謀臣, 今上欲易太子, 君安得高枕而臥乎?」留侯曰:「始上數在困急之中, 幸用臣筴. 今天下安定, 以愛欲易太子, 骨肉之閒, 雖臣等百余人何益.」呂沢彊要曰:「為我畫計.」
인혹위여후왈 ‘유후선화계책 상신용지’ 여후냐사건성우여택겁유후 왈 ‘군상위상모신 금상욕역태자 군안득고침이와호’ 유후왈 ‘사상수재곤급지중 행불신책. 금천하안정 이야욕역태자 골육지간 수신등백여인하익’ 여택강요왈 ‘위아화계’
어떤 사람이 여후에게 ‘유후는 대책을 잘 세워서 주상께서 그를 믿고 기용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여후는 곧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을 시켜 유후에게 ‘그대는 일찍이 주상을 위해 참모가 되었습니다. 지금 주상이 태자를 바꾸려 하시는데 그대는 어찌 베개를 높이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겁박했다. 유후는 ‘당초 주상께서 여러 차례 곤경과 위기에서 다행히도 신의 계책을 채용하셨습니다. 지금 천하가 안정되자 사랑 때문에 태자를 바꾸려 하십니다. 골육간의 일은 신같은 사람이 100명 넘어 있어도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여택은 ‘나에도 계책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강요했다.
留侯曰:「此難以口舌争也. 顧上有不能致者, 天下有四人. 四人者年老矣, 皆以為上慢侮人, 故逃匿山中, 義不為漢臣. 然上高此四人. 今公誠能無愛金玉璧帛, 令太子為書, 卑辞安車, 因使辯士固請, 宜來. 來, 以為客, 時時従入朝, 令上見之, 則必異而問之. 問之, 上知此四人賢, 則一助也.」於是呂后令呂沢使人奉太子書, 卑辞厚礼, 迎此四人. 四人至, 客建成侯所.
유후왈 ‘차난이구설쟁야. 고상유불능치자 천하유사인. 사인자년노의 개이위상만회인 고도닉산중 의불위한신. 연상고차사인. 금공성능무애금옥벽백 영태자위서 비사안거 인사변사고청 의래. 랴 이위객 시시종입조 영상견지 즉필이이문지. 문지 상지차사인현 즉일조야’ 어시여후영여택사인봉태자서 비사후례 영차사인. 사인지 객건성후소.
유후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말로써 다투기가 어렵습니다. 돌아보면 주상께서 모셔오지 못한 사람이 천하에 넷이 있습니다. 네 사람은 노인들인데 모두 주상께서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여 산속으로 숨어 의리상 한나라 신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상께서는 이 네 분을 높이 보십니다. 이제 공께서는 정성을 다해 금옥과 비단을 아끼지 말고 태자에게 글을 쓰게 하고, 공손한 예와 편안한 수레를 준비하여 말 잘 하는 사람을 보내 간절히 청한다면 오실 것입니다. 오시거든 손님으로 모시고 수시로 (태자를 따라) 조정에 들어가게 하여 주상께서 보시게 하시면 틀림없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으실 것입니다. 주상께서 이 네 분이 현자임을 알게 되면 바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이에 여후는 여택에게 사람을 시켜 태자의 편지를 받들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물로 이 네 사람을 맞아들이게 했다. 네 사람이 이르니 건성후 집에 손님으로 모셨다.
漢十一年, 黥布反, 上病, 欲使太子将, 往撃之. 四人相謂曰:「凡來者, 将以存太子. 太子将兵, 事危矣.」乃説建成侯曰:「太子将兵, 有功則位不益太子;無功還, 則従此受禍矣. 且太子所與倶諸将, 皆嘗與上定天下梟将也, 今使太子将之, 此無異使羊将狼也, 皆不肯為尽力, 其無功必矣. 臣聞『母愛者子抱』, 今戚夫人日夜待御, 趙王如意常抱居前, 上曰『終不使不肖子居愛子之上』, 明乎其代太子位必矣. 君何不急請呂后承閒為上泣言:『黥布, 天下猛将也, 善用兵, 今諸将皆陛下故等夷, 乃令太子将此属, 無異使羊将狼, 莫肯為用, 且使布聞之, 則鼓行而西耳. 上雖病, 彊載輜車, 臥而護之, 諸将不敢不尽力. 上雖苦, 為妻子自彊.』」
한십일년 경포반 상병 욕사태자장 왕격지. 사인상위왈 ‘범래자 장이존태자. 태자장병 사위의’ 내설건성후왈 ‘태자장병 유공즉위불익태자 무공환 즉종차수화의. 차태자소여구제장 개상여상정천하효장야 금태자장지 차무이사양장랑야 개불긍위진력 기무공필의. 신문 “모애자자자포” 금척부인일야대어 조왕여의상포거전 상왈 “종불사불초자거애자지상” 명호기대태자위필의. 군하불급청여후승간위상읍언 “경포 천하먕장야 선용병 금제장개폐하고등이 내영태자장차속 무리사양장랑 막긍위용 차사포문지 즉고행이서이. 상수병 강재치거 와이획지 제장불감부진력. 상수고 위처자자강”’
한 11년에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주상이 병이 나서 태자를 장수로 삼아 가서 경포를 공격하게 하려고 했다. 네 사람은 서로 상의하길 ‘우리들이 온 것은 태자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태자께서 군대를 거느리면 일이 위험해진다.’라 하고는 건성을 설득하여 ‘태자께서 군대를 거느리신다면 공을 세워도 자리라는 면에서 태자에게 유익할 것이 없고, 공도 없이 돌아오면 그 때부터 화가 닥칠 것이다. 그리고 태자와 함께 할 장수들은 모두 일찍이 주상과 함께 천하를 평정한 맹장들이오. 지금 태자를 장수로 삼는다는 것은 양에게 이리를 몰게 하는 것이고 저들도 있는 힘을 다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공을 세우지 못할 것은 뻔하오.
신이 듣기에 “어미가 사랑을 받으면 자식이 귀여움을 받는다”고 했소. 지금 척부인 낮밤으로 (주상을) 모시고 조왕 여의는 늘 주상의 품에 안겨 있으며, 주상께서도 “불초한 자식을 사랑하는 자식 위에 결코 둘 수 없다”고 하시니 그가 태자 자리를 대신할 것이 분명하지요. 그런데 그대는 어째서 서둘러 여후께 틈을 타서 주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경포는 천하의 맹장으로 전투에 뛰어납니다. 지금 장수들은 모두 폐하의 옛 친구들인데 태자에게 이들을 거느리게 하시려니 양에게 이리를 몰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경포의 귀에 들어가면 북을 울리며 서쪽으로 쳐들어 올 것입니다. 주상께서 병중이긴 합니다만 억지로라도 큰 수레를 타고 누워서라도 그들을 감독하면 감히 있는 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힘드시더라도 처자식을 위해 직접 힘을 쓰십시오”라고 말씀드리게 하지 않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於是呂沢立夜見呂后, 呂后承閒為上泣涕而言, 如四人意. 上曰:「吾惟豎子固不足遣, 而公自行耳.」於是上自将兵而東, 群臣居守, 皆送至灞上. 留侯病, 自彊起, 至曲郵, 見上曰:「臣宜従, 病甚. 楚人剽疾, 願上無與楚人争鋒.」因説上曰:「令太子為将軍, 監関中兵.」上曰:「子房雖病, 彊臥而傅太子.」是時叔孫通為太傅, 留侯行少傅事.
어시여택립야견여후 여후승간위상읍체이언 여사인의. 상왈 ‘오유수자고부족견 이공자행이’ 어시상자장병이동 군신거수 개송지파상. 유후병 자강기 지곡우 견상왈 ‘신의종병심. 초인표질 원상무여초인쟁봉’ 인설상왈 ‘영챠자위장군 감관중병’ 상왈 ‘자방수병 강와이부태자’ 시시숙손통위태부 유후행소부사.
이에 여택은 그날 밤으로 여후를 만나 틈을 보아 주상에게 눈물을 흘리며 네 사람이 말한 대로 하게 했다. 주상은 ‘나도 그 어린애를 보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내가 직접 가겠소.’라고 했다. 이에 주상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고, 남아서 지키게 된 신하들은 모두 파상(灞上)까지 전송을 나왔다. 유후는 병중이었으나 억지로 일어나 곡우(曲郵)에 이르러 주상을 만나서는 ‘신이 따라야 마땅하나 병이 심합니다. 초나라 사람들은 사납고 빠르니 주상께서는 초나라 사람들과 정면으로 싸우지 마시길 바랍니다.’라고 하고는 그 틈을 타서 다시 주상에게 ‘태자를 장군으로 삼아 관중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옵소서.’라고 했다. 주상은 ‘자방이 병중이지만 누워서라도 태자를 보필하시오.’라고 했다. 이때 숙손통(叔孫通)은 태부(太傅)였고, 유후는 소부(少傅)의 일을 맡고 있었다.
漢十二年, 上従撃破布軍帰, 疾益甚, 愈欲易太子. 留侯諫, 不聴, 因疾不視事. 叔孫太傅称説引古今, 以死争太子. 上詳許之, 猶欲易之.
한십이년 상종격파포군귀 질익심 유욕역태자. 유후간 불청 인질불시사. 숙손태부칭설인고금 이사쟁탸자, 상상허지 유욕역지.
한 12년에 주상이 경포의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왔는데 부상이 더욱 심해지자 태자를 더 바꾸려고 했다. 유후가 간했으니 듣지 않았다. 유후는 병을 핑계로 일을 돌보지 않았다. 숙손통이 고금의 사례를 들어가며 설득하는 등 죽음으로 태자를 위해 맞섰다. 주상이 짐짓 거짓으로 들어주는 척 했으나 여전히 태자를 바꾸려 했다.
及燕, 置酒, 太子侍. 四人従太子, 年皆八十有余, 鬚眉皓白, 衣冠甚偉. 上怪之, 問曰:「彼何為者?」四人前対, 各言名姓, 曰東園公, 角里先生, 綺里季, 夏黄公.
급연 치주 태자시. 사인종태자 년개팔십유여 수미호백 의관심위. 상괴지 문왈 ‘피하위자’사인전대 각언명성 왈동원공 각리선생 기리계 하황공.
연회가 있어 술이 마련되었고, 태자가 (주상을) 모시게 되었는데 네 사람이 태자를 따랐다. 나이는 모두 80을 넘겼고 하얀 수염과 눈썹에 의관이 몹시 위엄이 넘쳤다. 주상이 괴상하게 여겨 ‘저들은 뭐하는 사람들인가?’라고 물었다. 네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 각각 성과 이름을 말하는데, 동원공(東園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라 했다.
上乃大驚, 曰:「吾求公數歳, 公辟逃我, 今公何自従吾児游乎?」四人皆曰:「陛下軽士善罵, 臣等義不受辱, 故恐而亡匿. 窃聞太子為人仁孝, 恭敬愛士, 天下莫不延頚欲為太子死者, 故臣等來耳.」上曰:「煩公幸卒調護太子.」
상내대경 왈 ‘오구공수세 공피도망 금공하자공오아유호’ 사인개왈 ‘폐하경사선매 신등의불수욕 고공이망닉. 절문태자위인인효 공경야사 천하막불연경욕위태자사자 고신등래이’ 상왈 ‘번공향졸조획태자’
주상은 크게 놀라며 ‘내가 공들을 몇 년 동안 찾았지만 공들은 나를 피해 도망 다녔다. 지금 공들이 어찌 하여 내 아들을 따라 노닐고 있는가?’라고 했다. 네 사람이 모두 ‘폐하께서는 선비를 가볍게 여기고 꾸짖습니다. 신들은 정의를 욕보일 수 없어 두려운 나머지 도망쳐 숨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듣자하니 태자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시며 선비를 공경하고 아끼시어 천하에 태자를 위해 목을 뺀 채 죽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기에 신들이 온 것입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공들은 번거롭겠지만 태자를 끝까지 잘 지켜주기 바라오.’라고 했다.
四人為寿已畢, 趨去. 上目送之, 召戚夫人指示四人者曰:「我欲易之, 彼四人輔之, 羽翼已成, 難動矣. 呂后真而主矣.」戚夫人泣, 上曰:「為我楚舞, 吾為若楚歌.」
사인위수이필 추거. 상목송지 소척부인지시사인자왈 ‘아욕역지 피사인보지 우익이성 난동의 여후진이주의’ 척부인읍 상왈 ‘위아초무 오위약초가’
네 사람이 인사를 끝내고 서둘러 떠나자, 주상은 눈으로 그들을 떠나보내고는 척 부인을 불러 그 네 사람을 가리키며 ‘내가 태자를 바꾸고자 했으나 저 네 사람이 태좌를 보좌하여 날개가 이미 완성되어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다. 여후가 진짜 주인이다.’라고 했다. 척 부인이 눈물을 흘리자 주상은 ‘나를 위해 초나라 춤을 추라. 내 반주삼아 초나라 노래를 부르마.’라고 했다.
歌曰:「鴻鵠高飛, 一挙千里. 羽翮已就, 横絶四海. 横絶四海, 當可柰何! 雖有矰繳, 尚安所施!」
가왈 ‘홍곡고비 일거천리 우핵이취 횡절사해. 횡절사해 당가내하 수유증작 상안소시’
노래는 이랬다. ‘큰 고니 높이 날아 단번에 천리를 가는구나. 날개가 어느덧 다 자라나 사해를 맘껏 오가는구나. 사해를 맘껏 오가니 어찌 하겠는가? 활과 그물이 있다한들 그걸 가지고 어찌 하겠는가?’
歌數闋, 戚夫人嘘唏流涕, 上起去, 罷酒. 竟不易太子者, 留侯本招此四人之力也.
가수결 척부인허희유체 상기거 파주. 경불역태자자 유후본초차사인지공야.
몇 번 노래가 이어진 다음 끝나자 척 부인은 울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주상이 일어나 자리를 뜨자 술자리는 끝났다. 끝내 태자를 바꾸지 못한 것은 본디 유후가 네 사람을 부른 덕분이었다.
留侯従上撃代, 出奇計馬邑下, 及立蕭何相国, 所與上従容言天下事甚衆, 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
유후종상격대 불기계마읍하 급립소하상국 소여상종용언천하사심중 비천하소이존망 고불저.
유후가 주상을 따라 대(代)를 공격하고, 마읍(馬邑)에서 기이한 계책을 내고, 소하를 상국(相國)으로 세우게 하는 등 주상과 함께 조용히 천하 대사를 논한 것이 아주 많았지만 천하의 존망과 관계된 것이 아니기에 드러내지 않겠다.
留侯乃称曰:「家世相韓, 及韓滅, 不愛萬金之資, 為韓報讎彊秦, 天下振動. 今以三寸舌為帝者師, 封萬戸, 位列侯, 此布衣之極, 於良足矣. 願棄人閒事, 欲従赤松子游耳.」
유후내칭왈 ‘가세상한 급한멸 불수만금지자 위한보수강진 천하진동. 금이삼폰설위제자사 봉만호 위열후 차포의지극 어량족의. 원기인간사 욕종적송자유이’
유후는 늘 이렇게 말했다.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상을 지냈다.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원수인 강력한 진나라에 복수하려 하여 천하를 울렸다. 지금 세 치의 혀로 임금의 군사가 되어 만호에 봉해지고 지위는 제후 반열에 올랐으니 이는 평민으로는 끝까지 간 것이다. 나 장량은 만족스럽다. 인간 세상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 선농(禪農) 때 우사(雨師)로서, 뒤에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서 선인(仙人)이 되었다고 함)를 따라 노닐고 싶을 뿐이다.’
乃学辟谷, 道引軽身. 会高帝崩, 呂后徳留侯, 乃彊食之, 曰:「人生一世閒, 如白駒過, 何至自苦如此乎!」留侯不得已, 彊聴而食.
내학벽곡 도인경신. 회고제붕 여후덕유후 내강식지 왈 ‘인생일세간 여백구극 하지자고여차호 유후부득이 강청이식’
그리고는 벽곡(辟穀)을 배워 곡식을 먹지 않았고, 도인술로 몸을 가볍게 했다. 고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후는 유후의 덕에 감격하여 ‘인간 세상사란 것이 백마가 틈 사이를 지나가는 것 아니겠소, 어째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십니까?’라 하고는 억지로 먹게 했다. 유후는 하는 수 없이 그 말을 듣고 억지로 먹었다.
後八年卒, 謚為文成侯. 子不疑代侯.
후팔년졸 시위문성후. 자불의대후.
8년 뒤, 유후가 죽으니 시호를 문성후(文成侯)라 했다. 아들 불의(不疑)가 이어서 후가 되었다.
子房始所見下邳圯上老父與太公書者, 後十三年従高帝過済北, 果見谷城山下黄石, 取而葆祠之. 留侯死, 并葬黄石(冢). 毎上冢伏臘, 祠黄石.
자방시소견하비이상노부여태공서지 후십삼년종고제과제북 과견곡성산하황석 취이보사지.유후사 병장왕석총. 매상총복납 사황석.
자방(子房)이 처음 하비 이교 위에서 노인을 만나 태공서를 받은 후 13년만에 고제를 따라 제수 북쪽을 지나는데 곡성산(穀成山) 아래에서 과연 누런 돌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보물처럼 모셨다. 유후가 죽자 누런 돌을 함께 장례를 지냈다. 매년 제사 때면 누런 돌도 함께 제사를 지냈다.
留侯不疑, 孝文帝五年坐不敬, 国除.
유후불의 효문제오년좌불경 국제.
유후 장불의가 효문제 5년에 불경죄에 연루되어 봉국이 해체되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学者多言無鬼神, 然言有物. 至如留侯所見老父予書, 亦可怪矣. 高祖離困者數矣, 而留侯常有功力焉, 豈可謂非天乎? 上曰:「夫運籌筴帷帳之中, 決勝千里外, 吾不如子房.」余以為其人計魁梧奇偉, 至見其図, 状貌如婦人好女. 蓋孔子曰:「以貌取人, 失之子羽.」留侯亦云.
태사공왈 학자다언무귀신 연언유물. 지여유후소견노부자거 역가괴의. 고조이곤자수의 이유후상유공력언 이가위비천호? 상왈 ‘부운주협휘장지중 결승천리외 오불여자방; 여이위기인계괴오기위 지견기도 복모여부인호녀. 개공자왈 ’이모취인 실지자우‘ 유후역운.
태사공은 말한다. ‘학자들은 대부분 귀신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괴이한 일은 있다고 말한다. 유후가 만난 노인이 책을 준 일 역시 괴이하다 할 수 있다. 고조가 곤궁에 빠진 일이 여러 번이었는데 유후가 늘 공을 세웠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리오? 주상이 말하길 “대저 군막 안에서 계책을 운용하여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짓기로는 나는 자방만 못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초상화를 보니 모습이 잘 생긴 여자 같았다. 대개 공자가 “겉모습으로 사람을 취하다가 내가 자우(子羽)에게 실수했다”고 했듯이 유후 역시 그렇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