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家- 蕭相國世家
(蕭相國世家)
<소하의 출신과 역할 및 공적>
蕭相国何者, 沛豊人也. 以文無害為沛主吏掾.
소상국하자 패풍인야. 이문무해위패주리연.
소상국(蕭相國) 하(何)는 패현(沛縣) 풍읍(豐邑) 사람이다. 법조문에 해박한 소하를 패현의 주리(主吏:인사나 총무담당)으로 지냈다.
高祖為布衣時, 何數以吏事護高祖. 高祖為亭長, 常左右之. 高祖以吏繇咸陽, 吏皆送奉銭三, 何独以五.
고조위포의시 하수이리사호고조. 고조위정장 상좌우지. 고조이리요함양 리새송봉전삼 하독이오.
고조의 평민 시절 소하는 관리로서 여러 차례 고조를 섬겼다. 고조가 정장(亭長)이 되었을 때도 늘 그를 도왔다. 고조가 관리로서 함양(咸陽)에 요역을 가게 되었을 때 관리들이 모두 300전의 송별금을 주었으나 소하만 500전을 보냈다.
秦御史監郡者與従事, 常辨之. 何乃給泗水卒史事, 第一. 秦御史欲入言徴何, 何固請, 得毋行.
진어사감군자여종사 상변지. 하내합사수졸사사 제일. 진어사욕입언징하 하고청 득무행.
군을 감독하는 진(秦)나라의 어사감군(御史監郡)과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는데 늘 일을 잘 처리했다. 이에 소하에게 사수(泗水)군의 졸사(卒史)라는 자리가 주어졌는데 성적이 제일이었다. 진나라의 어사가 소하를 기용하려고 조정에 이야기했으나 소하는 한사코 사양하며 가지 않았다.
及高祖起為沛公, 何常為丞督事. 沛公至咸陽, 諸将皆争走金帛財物之府分之, 何独先入収秦丞相御史律令図書蔵之. 沛公為漢王, 以何為丞相. 項王與諸侯屠焼咸陽而去. 漢王所以具知天下阨塞, 戸口多少, 彊弱之処, 民所疾苦者, 以何具得秦図書也. 何進言韓信, 漢王以信為大将軍. 語在淮陰侯事中.
급고조기위패공 하상위승독사. 패공지함양 제장개쟁주금백재물지부분지 하독선입수진승상어사율열도서장지. 패공위한왕 이하위승상. 항왕여제후속소함양이거. 한왕소이구지천하애색 호구다소 강약지처 민소질고자 이하구득진도서야. 하진언한신 한왕이신위대장군. 어재회음후사중.
고조가 봉기하여 패공(沛公)이 되자 소하는 승상(丞相)이 되어 늘 일을 감독했다. 패공이 함양에 이르자 장수들이 모두 돈과 비단 등 재물이 있는 창고로 다투어 달려가 나누어 가지려 했지만 소하는 먼저 들어가 진나라의 승상부과 어사부의 율령과 도서 따위를 챙겼다. 패공이 한왕(漢王)이 되자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 항왕(項王)과 제후들은 함양을 불태우고 갔다. 한왕이 천하의 요새, 호구의 많고 적음, 강약의 소재, 백성의 고통 등을 다 알게 된 것은 소하가 진나라의 문서를 얻었기 때문이다. 소하가 한신을 추천하자 한왕은 한신(韓信)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일은 회음후(淮陰侯, 한신)에 관한 일에 기록되어 있다.(회음후열전)
漢王引兵東定三秦, 何以丞相留収巴蜀, 填撫諭告, 使給軍食.
한왕인병동정삼진 하이승상유수파촉 진무유고 사급군식.
한왕이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소하는 승상으로 (한중에) 남아 파촉(巴蜀)을 지키면서 그 지역을 안정시키고 군에 식량을 공급했다.
漢二年, 漢王與諸侯撃楚, 何守関中, 侍太子, 治櫟陽. 為法令約束, 立宗廟社稷宮室県邑, 輒奏上, 可, 許以従事;即不及奏上, 輒以便宜施行, 上來以聞. 関中事計戸口転漕給軍, 漢王數失軍遁去, 何常興関中卒, 輒補欠. 上以此専属任何関中事.
한이년 한왕여제후격초 하수관중 시태자 치역양. 위법령약속 립종묘사직궁실현읍 첩진상 가 허이종사 즉불급진상 첩이편이시행 상래이간. 관중사셰로구전조급군 한왕수실군둔거 하상흥관중졸 첩보흠. 상이차전속임하관중사.
한 2년(기원전 205년)에 한왕이 제후들과 초(楚)나라를 칠 때 소하는 관중(關中)을 지키고 태자를 보살피면서 역양(櫟陽)을 다스렸다. 법령과 규정을 만들고, 종묘, 사직, 궁실, 현읍을 세웠는데 바로바로 주상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얻어 일을 처리했다. 주상에게 보고를 올릴 경황이 없으면 알아서 시행하고 주상이 돌아오면 보고했다. 관중의 호구를 헤아려 군에 식량 공급했다. 한왕이 몇 차례 군을 잃고 도망 다닐 때도 소하는 늘 관중에서 병졸을 내서 바로 바로 보충했다. 주상은 이 때문에 소하에게 관중의 일을 전적으로 맡겼다.
漢三年, 漢王與項羽相距京索之閒, 上數使使勞苦丞相. 鮑生謂丞相曰:「王暴衣露蓋, 數使使勞苦君者, 有疑君心也. 為君計, 莫若遣君子孫昆弟能勝兵者悉詣軍所, 上必益信君.」於是何従其計, 漢王大説.
한삼년 한왕여항우상거경색지간 상수사사노고승상. 포생위승상왈 ‘왕촉의로게 수사사노고군자 유의군심야 위군계 막약견군자손곤제능승병자실예군소 상필익신군’ 어시하종기계 한왕대열.
한 3년에 한왕은 경현(京縣)과 삭정(索亭) 사이에서 항우와 서로 대치하고 있으면서 몇 차례나 사람을 보내 승상을 위로했다. 포생(鮑生)이 승상에게 ‘왕께서 햇빛을 받으며 노숙하면서도 몇 번이나 사신을 보내 당신을 위로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위해 생각해보니 당신의 자손과 형제들 중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모두 군으로 보내는 것보다 나은 계책은 없습니다. 주상은 틀림없이 당신을 더욱 신임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소하는 그 계책을 따랐고, 한왕은 크게 기뻐했다.
<천하평정과 논공행상>
漢五年, 既殺項羽, 定天下, 論功行封. 群臣争功, 歳余功不決. 高祖以蕭何功最盛, 封為酇侯, 所食邑多.
한오년 기살항우 정천하 논공행봉 군신쟁공 세여공부결. 고조이소하공최성 봉위찬후 소식읍다.
한 5년에 항우를 죽이고 천하를 평정하자 논공행상을 벌였다. 신하들이 공을 다투느라 해를 넘기도록 공을 결정하지 못했다. 고조는 소하의 공이 가장 많다고 여겨 찬후(酇侯)로 봉하니 주어진 식읍도 가장 많았다.
功臣皆曰:「臣等身被堅執鋭, 多者百余戦, 少者數十合, 攻城略地, 大小各有差. 今蕭何未嘗有汗馬之勞, 徒持文墨議論, 不戦, 顧反居臣等上, 何也?」
공신개왈 ‘신등신치견집예 다자백여전 소자수십합 공성략지 대소각유차. 금소하미상유한마지로 사지문흑의론 부전 고반거신등상 하야’
공신들이 하나 같이 ‘신들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채 많게는 100번이 넘게 적어도 수십 번 전투를 치르며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모두 성과 땅을 공략했습니다. 지금 소하는 말이 땀을 흘리는 노고도 없이 그저 글로써 이러쿵저러쿵했을 뿐입니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신들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니 왜 그렇습니까?’라고 했다.
高帝曰:「諸君知猟乎?」曰:「知之.」「知猟狗乎?」曰:「知之.」高帝曰:「夫猟, 追殺獣免者狗也, 而発蹤指示獣処者人也. 今諸君徒能得走獣耳, 功狗也. 至如蕭何, 発蹤指示, 功人也. 且諸君独以身随我, 多者両三人. 今蕭何挙宗數十人皆随我, 功不可忘也.」群臣皆莫敢言.
고제왈 ‘제군지렵호’ 왈 ‘지지’ ‘지렵구호’ 왈 ‘지지’ 고제왈 ‘부렵 추살수토자구야 이발종지시수처자인야. 금제군사능득주수이 공구야. 지여소하 발종지시 공인야. 차제군독이신수아 다자양삼인. 금소하거종수십인개수아 공불가망야’ 군신개막감언.
고제가 ‘그대들이 사냥에 대해서는 알겠지?’라고 묻자 ‘알지요.’라고 했다. ‘사냥개도 알지?’라고 하자 ‘알지요.’라고 했다. 고제는 이렇게 말했다. ‘사냥에서 짐승이나 토끼 따위를 뒤쫓아 죽이는 것은 사냥개다. 그러나 사냥개를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지시하는 것은 사람이다. 지금 그대들은 그저 짐승을 뒤쫓았을 뿐이니 사냥개의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소하는 사냥개를 풀어 있는 곳을 지시했으니 사람의 공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혼자의 몸으로 나를 따랐거나 많아야 두 세 사람이었지만 소하는 집안사람 수십 명을 모두 내게 딸려 보냈으니 그 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하들 모두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列侯畢已受封, 及奏位次, 皆曰:「平陽侯曹參身被七十創, 攻城略地, 功最多, 宜第一.」
열후필이수봉 급진위차 개왈 ‘평양후조참신피칠십창 공성략지 공최다 의제일’
열후들이 모두 봉해지자 순서를 정해달라며 모두들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은 70군데나 상처를 입었고 성을 공격하고 영토를 공략하는 공이 가장 많으니 맨 앞이 마땅합니다.’라고 아뢰었다.
上已橈功臣, 多封蕭何, 至位次未有以复難之, 然心欲何第一. 関内侯鄂君進曰:「群臣議皆誤. 夫曹參雖有野戦略地之功, 此特一時之事. 夫上與楚相距五歳, 常失軍亡衆, 逃身遁者數矣.
상이뇨공신 다봉소하 지위차미유이복란지 연심욕하제일. 관내후학군진왈 ‘군신의개오 부조참수유야전략지지공 차특일시지사. 부상여초상거오세 상실둔망중 도신둔자수의.
주상은 이미 공신들을 굴복시켰고 소하를 크게 봉했기 때문에 순서를 가지고 다시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려 했으나 마음은 소하를 맨 앞에 두고 싶었다. 이 때 관내후(關內侯) 악천추(鄂千秋)가 ‘신하들의 논의가 모두 잘못 되었습니다. 조참이 야전에서 땅을 공략한 공은 있지만 이는 한 때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저 주상께서 초나라와 5년을 서로 대치하면서 군과 백성을 잃고 도망 다니길 여러 차례였습니다.
然蕭何常従関中遣軍補其処, 非上所詔令召, 而數萬衆会上之乏絶者數矣. 夫漢與楚相守滎陽數年, 軍無見糧, 蕭何転漕関中, 給食不乏. 陛下雖數亡山東, 蕭何常全関中以待陛下, 此萬世之功也.
연소하상종관중견군보기차 비상소소영소 이수만중회상지핍잘자수의. 부한여초상수형야수년 군무견량 소하전조관중 급식불핍. 폐하수수망산동 소하상전관중이시폐하 차만세지공야.
그러나 소하는 늘 관중에서 그곳으로 군대와 물자를 보충했는데 주상께서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고, 또 주상에게 사람이 없을 때 수만 명을 보낸 것도 여러 차례입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형양(滎陽)을 지키며 서로 대치하길 몇 년의 세월동안 군에 양식이 떨어지면 소하가 육로와 수로로 운반하여 부족한 식량을 공급했습니다. 폐하께서 여러 번 산동(山東)을 잃었지만 소하는 늘 관중을 온전히 지키면서 폐하를 기다렸으니 이는 만세에 길이 남을 공입니다.
今雖亡曹參等百數, 何欠於漢? 漢得之不必待以全. 柰何欲以一旦之功而加萬世之功哉! 蕭何第一, 曹參次之.」高祖曰:「善.」於是乃令蕭何[第一], 賜帯剣履上殿, 入朝不趨.
금수망조참등백수 하흠어한 한득지불필대이전. 내하욕이일단지공이가만세지공재 소하등일 조참차지’ 고조왈 ‘선’ 어시냐영소하(제일) 사대검이상전 입조불추.
지금 조참과 같은 자들 수백 명이 없다고 한들 한나라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한나라가 꼭 저들이 있어서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어찌 하루아침의 공이 만세의 공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소하가 제일이고 조참이 그 다음입니다.’라고 했다. 고조가 ‘맞다.’라고 했다. 이에 바로 명령을 내려 소하를 제일로 삼는 한편, 검을 차고 신을 신은 채 대전에 들어올 수 있고, 또 조정에서 잰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얻었다.
上曰:「吾聞進賢受上賞. 蕭何功雖高, 得鄂君乃益明.」於是因鄂君故所食関内侯邑封為安平侯. 是日, 悉封何父子兄弟十余人, 皆有食邑. 乃益封何二千戸, 以帝嘗繇咸陽時何送我独贏銭二也.
상왈 ‘오문진현수상상. 소하송수고 득악군내익명’ 어시인악군고소식관내후읍봉위안평후. 시일 실봉하부자형제십여인 개유식읍. 내익봉하이천호 이제상요함양시하송아독영전이야.
고조는 ‘내가 듣기에 유능한 사람을 추천하면 큰 상을 받아야 한다. 소하의 공이 크긴 하지만 악군(악천추)으로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라고 했다. 이에 악천추에게 전에 받은 식읍과 관내후에 안평후(安平侯)를 더해 주었다. 같은 날에 소하의 부자 형제 10여 명도 모두 땅을 받아 영지를 얻었다. 이밖에 소하에게 2천 호를 더 봉했는데 황제가 일찍이 함양으로 요역갈 때 소하만 황제에게 200전을 더 보태 주었기 때문이다.
<고조 즉위 후 소하의 상황과 죽음>
漢十一年, 陳豨反, 高祖自将, 至邯鄲. 未罷, 淮陰侯謀反関中, 呂后用蕭何計, 誅淮陰侯, 語在淮陰事中.
한십일년 진희반 고조자장 지한단. 미파 회음후모반관중 여후용소하계 주회음후 어재회음사중.
한 11년(기원전 196년) 가을에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조는 스스로 장수가 되어 한단(邯鄲)에 이르렀다. 정벌을 끝내지 못했는데 회음후가 관중에서 모반하여 여후가 소하의 계책을 사용하여 회음후를 죽였다. 이 일은 「회음후열전」에 있다.
上已聞淮陰侯誅, 使使拝丞相何為相国, 益封五千戸, 令卒五百人一都尉為相国衛. 諸君皆賀, 召平独弔. 召平者, 故秦東陵侯. 秦破, 為布衣, 貧, 種瓜於長安城東, 瓜美, 故世俗謂之「東陵瓜」, 従召平以為名也.
상이문회음후주 사사배승상하위상국 익봉오천호 영졸오백인도위위상국위. 제군개하 소평독조. 소명자 고진동릉후. 진파 위포의 빈 종과어장안성동 과미 고세속위지 ‘동릉과’ 종소평이위명야.
주상이 회음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소하를 상국(相國)으로 삼고 5천 호를 더 봉하면서 병졸 500명과 도위 한 사람에게 상국을 지키게 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축하했지만 소평(召平) 혼자 조의를 표시했다. 소평은 옛날 진나라의 동릉후(東陵侯)였다. 진나라가 무너지자 평민이 되어 가난하게 장안성(長安城) 동쪽에서 오이를 길렀다. 오이가 맛이 좋았기 때문에 세속에서 그것을 ‘동릉과(東陵瓜)’라 불렀다. 소평의 작위를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召平謂相国曰:「禍自此始矣. 上暴露於外而君守於中, 非被矢石之事而益君封置衛者, 以今者淮陰侯新反於中, 疑君心矣. 夫置衛衛君, 非以寵君也. 願君譲封勿受, 悉以家私財佐軍, 則上心説.」相国従其計, 高帝乃大喜.
소평위상국왈 ‘화자차시의 상폭로어외이군수어중 비피시석지사이익군봉치위자 이금자회음후신반어중 의군심의. 부치위위군 비이총군야. 원군양봉물수 실이가사재좌군 즉상심열’ 상국종기계 고제내대희.
소평은 상국에게 ‘화가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외지에 나가 계신데 군께서는 궁중을 지키고 있습니다. (전투에 나가) 화살이나 돌을 맞는 일도 없는데 군께 땅을 더 내리고 호위를 배치한 것은 회음후가 그 와중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군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호위병을 두어 군을 지키게 한 것은 군을 총애해서가 아닙니다. 군께서는 땅을 사양하여 받지 마시고, 집안의 사재를 전부 군에 보태십시오.’라고 했다. 상국이 그 계책에 따르니 고제가 크게 기뻐했다.
漢十二年秋, 黥布反, 上自将撃之, 數使使問相国何為. 相国為上在軍, 乃拊循勉力百姓, 悉以所有佐軍, 如陳豨時. 한십이년추 경포반 상자장격지 수사사문상국하위. 상국위상재군 내부순면력백성 실이소유좌군 여진희시.
한 12년 가을 경포(黥布)의 반란을 주상이 몸소 장수가 되어 이를 치면서 몇 차례 사신을 보내 상국 소하가 뭘 하는지를 물었다. 상국은 군대에 있는 주상을 위해 백성들을 다독이고 격려하는 한편 모든 것을 군에 보태는 등 진희의 반란 때와 같았다.
客有説相国曰:「君滅族不久矣. 夫君位為相国, 功第一, 可复加哉? 然君初入関中, 得百姓心, 十余年矣, 皆附君, 常复孳孳得民和. 上所為數問君者, 畏君傾動関中. 今君胡不多買田地, 賎貰貸以自汚? 上心乃安.」於是相国従其計, 上乃大説.
객유설상국왈 ‘군명족불구의 부군위위상국 공제일 가복가재 연군초입관중 득백성심 십여년의 개부순 상복자자득민화. 상소위수문군자 외군경동관중. 금군호불다매전지 전세대이자오 상심내안’ 어시상국종기계 상내대열.
어떤 객이 상국에게 ‘군께서 멸족당할 일이 멀지 않았습니다. 지금 군께서는 상국의 지위에 공도 제일이니 거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군께서 처음 관중에 들어가셔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지 10년이 넘었고 그래서 모두 군을 따릅니다. 군께서도 부지런히 백성들을 보살피니 백성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습니다. 황상께서 몇 차례 군에 대해 물으신 것은 관중이 군 쪽으로 기우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군께서는 이제부터라도 낮은 이자로 땅을 빌려주는 등 스스로 욕먹을 짓을 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러면 주상께서 마음을 놓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상국은 그 계책을 따랐고 주상은 이내 크게 기뻐했다.
上罷布軍帰, 民道遮行上書, 言相国賎彊買民田宅數千萬.
상파포군귀 민도서행상거 언상국전강매민전댁수만.
주상이 경포의 군대를 해체하고 돌아오는데 백성들이 길을 막고 글을 올려 상국이 강제로 수천 만 전이나 되는 인민들의 땅과 집을 (돈도 안 주고) 강제로 샀다고 말했다.
上至, 相国謁. 上笑曰:「夫相国乃利民!」民所上書皆以與相国, 曰:「君自謝民.」
상지 상국알. 상소왈 ‘부상국내이민’ 민소상서개이여상국 왈 ‘군자사민’
주상이 도착하자 상국이 인사를 올렸다. 주상은 웃으며 ‘상국이 이렇게 백성을 이롭게 했구먼!’라 하고는 백성들이 올린 글을 모두 상국에게 주면서 ‘상국은 알아서 백성들에게 사죄하시오!’라 했다.
相国因為民請曰:「長安地狭, 上林中多空地, 棄, 願令民得入田, 毋収稿為禽獣食.」
상국인위민청왈 ‘장안지협 상림중다공지 기 원영민득입전 무수소위금수식’
상국은 이참에 백성들을 위해 ‘장안의 땅은 좁은데 상림원(上林苑)에는 빈터가 많고 버려져 있으니 백성들이 들어가 밭을 갈 수 있게 하고 수확한 짚단 따위를 남겨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上大怒曰:「相国多受賈人財物, 乃為請吾苑!」乃下相国廷尉, 械繋之.
상대노왈 ‘상국다수매인재물 내위청오원’ 내하상국정위 계계지.
주상이 크게 화를 내며 ‘상국이 상인들로부터 받은 재물이 많은 모양이구나! 나의 상림원을 요청하다니!’라 하고는 상국을 정위(廷尉)에게 넘겨 형구를 채워 가두었다.
數日, 王衛尉侍, 前問曰:「相国何大罪, 陛下繋之暴也?」上曰:「吾聞李斯相秦皇帝, 有善帰主, 有悪自與. 今相国多受賈豎金而為民請吾苑, 以自媚於民, 故繋治之.」
수일 왕위위시 전문왈 ‘상국하대죄 폐하계지폭야’ 상왈 ‘오문이사상진황제 유선귀주 유오자여. 금상국다수매수금이위민청오원 이자미어민 고계치지’
며칠 뒤 왕씨 성의 위위(衛尉: 9경(卿)의 하나)가 나서 ‘상국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폐하께서 그토록 갑자기 가두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주상은 ‘내가 듣기에 이사(李斯)가 진시황 때 승상으로 있으면서 좋은 일은 군주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자신이 졌다. 지금 상국이 장사치들에게 돈을 많이 받고 그 자들을 위해 내 상림원을 요청하여 자신이 백성에게 아부하려고 해서 그를 가두어 법으로 다스리려 한 것이다.’라고 했다.
王衛尉曰:「夫職事苟有便於民而請之, 真宰相事, 陛下柰何乃疑相国受賈人銭乎! 且陛下距楚數歳, 陳豨、黥布反, 陛下自将而往, 當是時, 相国守関中, 揺足則関以西非陛下有也. 相国不以此時為利, 今乃利賈人之金乎? 且秦以不聞其過亡天下, 李斯之分過, 又何足法哉. 陛下何疑宰相之浅也.」高帝不懌. 是日, 使使持節赦出相国.
왕위위왈 ‘부직사순유편어민이청지 진재상사 폐하내하내의상국수먀인전호 차폐하불거초수세 진희 경포반 폐하자장이왕 당시시 상숫수관중 요족즉관이서비폐하유야. 상국불이차시위리 금내리매인지호금 차진이불문기과망천하 이사지분과 우하족법재. 폐하하의재상지천야’ 고제불역. 시일 사사지절사출상국.
왕 위위는 ‘대저 직무상 정말 백성에게 이로움이 있으면 요청하는 것, 이것이 진짜 재상의 일인데 폐하께서는 어찌 하여 상국이 상인에게 돈을 받았다고 의심하십니까? 그리고 폐하께서는 몇 해 동안 초나라와 싸웠고, 진희와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폐하께서 몸소 장수가 되어 나가셨습니다. 그 때마다 상국이 관중을 지켰고, (상국이) 발을 뺐더라면 함곡관 서쪽은 폐하 차지가 못 되었을 것입니다. 상국은 그 때도 이익을 꾀하지 않았는데 지금 상인의 돈으로 이익을 꾀했겠습니까? 또 진나라(진시황)는 자신의 잘못을 몰라서 천하를 잃은 것인데 이사가 잘못을 떠맡은 것을 뭣 하러 본받는단 말입니까? 폐하께서는 재상을 어째서 그렇게 낮추어 의심하십니까?’라고 했다. 고제는 언짢았으나 그 날 부절(符節)을 가진 사신을 보내 상국을 사면하고 풀어 주었다.
相国年老, 素恭謹, 入, 徒跣謝. 高帝曰:「相国休矣! 相国為民請苑, 吾不許, 我不過為桀紂主, 而相国為賢相. 吾故繋相国, 欲令百姓聞吾過也.」
상국연노 소공근 입 도선사. 고제왈 ‘상국휴의 상국위민청원 오불허 아불과이걸주주 이상국위현상. 오고계상국 욕용뱍성문오과야’
상국은 나이가 많았고 평소에도 공경스럽고 조심스러웠다. (조정에) 들어가 맨발로 사죄하자 고제는 ‘상국은 그렇게 하지 마시오! 상국은 백성을 위해 부탁했고 나는 허락하지 않았으니 나는 걸(桀), 주(紂) 같은 군주에 지나지 않고 상국은 어진 재상이 되었소. 내가 일부러 상국을 가두어 백성들이 내 잘못을 알게 하려고 한 것이오.’라고 했다.
何素不與曹參相能, 及何病, 孝恵自臨視相国病, 因問曰:「君即百歳後, 誰可代君者?」対曰:「知臣莫如主.」孝恵曰:「曹參何如?」何頓首曰:「帝得之矣! 臣死不恨矣!」
하소불여조참상능 급하병 효혜자임시상국병 인문왈 ‘군즉백세후 수가대군자’ 대왈 ‘지신막여주’ 효혜왈 ‘조참하여’ 하돈수왈 ‘제득지의 신사불한의’
소하는 평소 조참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하가 병이 들자 혜제(惠帝)는 몸소 상국을 찾아와 병문안을 하며 ‘만약 그대의 100년 뒤라면(죽으면) 누가 그대의 뒤를 잇겠소?’라고 물었다. 소하는 ‘신하를 군주보다 잘 알 수는 없지요.’라고 대답했다. 효혜가 ‘조참이 어떻소?’라고 하자 소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폐하께서 제대로 보셨습니다. 신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何置田宅必居窮処, 為家不治垣屋. 曰:「後世賢, 師吾倹;不賢, 毋為勢家所奪.」
하치전택필거궁처 위가불치단옥. 왈 ‘후세현 사오검 불현 무위세가소탈’
소하는 땅과 집을 반드시 외딴 곳에 두었고 집에 담장도 없었다. 그러면서 ‘후손이 똑똑하면 나의 검소함을 배울 것이고, 똑똑하지 못하더라도 권세가에게 빼앗길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孝恵二年, 相国何卒, 謚為文終侯.
효혜이년 상국하졸 시위문종후.
혜제 2년(기원전 193년)에 상국 소하가 죽고 시호는 문종후(文終侯)였다.
後嗣以罪失侯者四世, 絶, 天子輒复求何後, 封続酇侯, 功臣莫得比焉.
후사이죄실후자사세 절 천자첩복구하후 봉속찬후 공신막득차언.
4세 후손이 죄를 지어 제후의 작위를 잃고 끊어졌는데 천자가 바로 다시 소하의 후손을 찾아 찬후(酇侯)에 봉하니 이에 비교할 공신은 없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蕭相国何於秦時為刀筆吏, 錄錄未有奇節. 及漢興, 依日月之末光, 何謹守管籥, 因民之疾奉法, 順流與之更始. 淮陰、黥布等皆以誅滅, 而何之勳爛焉. 位冠群臣, 声施後世, 與閎夭、散宜生等争烈矣.
태사공왈 소상국하어진시위도필리 여여미유기절. 급한흥 의일월지말광 하근수관약 인민질봉법 순류여지경시. 회음 경포등개이주멸 이하지훈난언. 위관군신 성시후세 여굉요 산의생등쟁열의.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상국 소하는 진나라 때 도필리(刀筆吏:하급관리를 얕잡아 일컫는 말)로서 무슨 특별한 행적 없이 평범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해와 달의 후광에 힘입어 소하는 삼가 열쇠와 자물통을 잘 지켰고 진나라 법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해 순리에 따라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다. 한신과 경포 등이 죽임을 당한 뒤 소하의 공적은 더욱 더 빛나게 드러났다. 그 지위는 신하들 중 으뜸이고 명성은 후대에게까지 전해지니 굉요(閎夭)나 산의생(散宜生) 등의 공적에 비할 만하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