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家-越王句踐世家
<구천과 오월쟁패>
越王句践, 其先禹之苗裔, 而夏后帝少康之庶子也. 封於会稽, 以奉守禹之祀. 文身断髪, 披草莱而邑焉. 後二十余世, 至於允常. 允常之時, 與呉王闔廬戦而相怨伐. 允常卒, 子句践立, 是為越王.
월왕구천 기선우지묘예 이하후제소강지서자야. 봉어회계 이봉수우지사. 문신단발 피초래이읍언. 후이십여세 지어윤상. 윤상지시 여오왕합려전이상원벌. 윤상졸 자구천립 시위월왕.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그 선조가 우(禹)나라의 후예로서 하후(夏后) 제소강(帝少康)의 서자였다.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나라의 제사를 받들었다. 문신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풀을 뽑고 나무를 베는 등 황무지를 개척하여 읍을 만들었다. 그 후 20여 세(世)가 지나 윤상(允常)에 이르렀다. 윤상 때 오왕(吳王) 합려(闔廬)와 싸워 서로 원한을 품고 정벌하게 되었다.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句踐)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월왕이다.
元年, 呉王闔廬聞允常死, 乃興師伐越. 越王句践使死士挑戦, 三行, 至呉陳, 呼而自剄. 呉師観之, 越因襲撃呉師, 呉師敗於檇李, 射傷呉王闔廬. 闔廬且死, 告其子夫差曰:「必毋忘越.」
원년 오왕합려문윤상사 내흥사벌월. 월왕구천사사사도전 삼행 지오진 호이자경. 오사관지 월인습격오사 오사패어취리 사상오왕합려. 합려차사 고기자부차왈 ‘필무망월’
월왕 구천 원년(기원전 496년)에 오왕 합려는 윤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일으켜 월나라를 정벌했다. 월왕 구천은 결사대로 맞서 싸웠는데, 세 줄을 지어 오나라의 진영에 이르러 고함을 지르며 목을 베어 죽었다. 오나라의 군대가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나라가 오나라의 군대를 습격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취리(檇李)에서 패배시키는 한편 오왕 합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혔다. 합려가 죽음을 앞두고 그 아들 부차(夫差)에게 ‘월나라를 절대 잊지 말아라!’라고 했다.
三年, 句践聞呉王夫差日夜勒兵, 且以報越, 越欲先呉未発往伐之. 范蠡諫曰:「不可. 臣聞兵者凶器也, 戦者逆徳也, 争者事之末也. 陰謀逆徳, 好用凶器, 試身於所末, 上帝禁之, 行者不利.」越王曰:「吾已決之矣.」遂興師. 呉王聞之, 悉発精兵撃越, 敗之夫椒. 越王乃以余兵五千人保棲於会稽. 呉王追而囲之.
삼년 구천문오왕부차일야근병 차이보월 월욕선오미발왕벌지. 범려간왈 ‘불가 신문병자흉기야 전자역덕야 쟁자사지말야. 음모역덕 호용흉기 시신어소말 상제금지 행자불리’ 월왕왈 ‘오이결지의’ 수흥사. 오왕문지 실발정병격월 패지부추. 월왕내이여병오천인보서어회계. 오왕추이위지.
구천 3년에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가 밤낮으로 병사를 훈련시켜 월나라에 보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나라가 나서기 전에 월나라가 먼저 오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범려(范蠡)가 ‘안 됩니다. 신이 듣기에 군대는 흉기이며, 전쟁은 덕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싸움은 모든 일의 맨 마지막입니다. 음모로 덕을 거스르고, 흉기를 즐겨 사용하여 자신의 몸을 보잘 것 없는 곳에다 시험하려는 것은 상제께서 금할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충고했다. 월나라 왕은 ‘내가 이미 결심했다.’고 하면서 드디어 군대를 일으켰다. 오나라 왕이 이를 듣고는 정예병을 모두 징발하여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추(夫椒)에서 패배시켰다. 월나라 왕은 남은 병사 5천을 수습하여 회계산(會稽山)을 거점으로 수비에 들어갔고, 오나라 왕은 추격하여 이곳을 에워쌌다.
越王謂范蠡曰:「以不聴子故至於此, 為之柰何?」蠡対曰:「持満者與天, 定傾者與人, 節事者以地. 卑辞厚礼以遺之, 不許, 而身與之市.」句践曰:「諾.」乃令大夫種行成於呉, 膝行頓首曰:「君王亡臣句践使陪臣種敢告下執事:句践請為臣, 妻為妾.」呉王将許之. 子胥言於呉王曰:「天以越賜呉, 勿許也.」
월왕위범려왈 ‘이불청자고지어차 위지내하’ 려대왈 ‘지만자여천 정경자여인 절사자이지 비사후례이유지 불허 이신여지시’ 구천왈 ‘락’ 내영대부종행성어오 슬행돈수왈 “군왕망신구천사배신종감고하집사 구천청위신 처위첩” 오왕장허지 자서언어오왕왈 ‘천이월사오 물허야’
월왕은 범려에게 ‘그대 말을 듣지 않은 까닭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하면 되겠소?’라고 했다. 범려는 ‘가득 찬 것이 지속되려면 하늘이 도와야 하고, 기운 것을 바로 세우려면 사람이 도와야 하며, 절제할 수 있으려면 땅이 도와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말과 넉넉한 예물을 그 쪽에 보내십시오. 허락하지 않으면 몸이라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구천이 ‘좋소.’라 하고는 바로 대부 문종(文種)에게 오나라로 가서 일을 성사시키게 했다. (문종이) 무릎으로 기어 머리를 조아리며 ‘군왕에게 망한 신하 구천이 심부름꾼 신 문종을 보내 여러분들께 “구천은 신하가 되고, 그의 처는 군왕의 첩이 되길 청합니다”라고 감히 아뢰라고 했습니다.’라 했다. 오왕이 이를 허락하려 하자, 오자서(伍子胥)가 오왕에게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게 주시려는데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種還, 以報句践. 句践欲殺妻子, 燔宝器, 触戦以死. 種止句践曰:「夫呉太宰嚭貪, 可誘以利, 請閒行言之.」於是句践以美女宝器令種閒献呉太宰嚭. 嚭受, 乃見大夫種於呉王. 種頓首言曰:「願大王赦句践之罪, 尽入其宝器. 不幸不赦, 句践将尽殺其妻子, 燔其宝器, 悉五千人触戦, 必有當也.」
종환 이보구천, 구천욕살처자 번보기 촉전이사. 종지구천왈 ‘부오태재비탐 가유이이 청한행언지’ 어시구천이미녀보기영종한헌오태재비. 비수 내견대부종어오왕. 종돈수언왈 ‘원대왕사구천지죄 진입기보기 불행불사 구천장진살기처자 번기보기 실오천인촉전 필유당야’
문종이 돌아와 구천에게 보고하자 구천은 처자식을 죽이고 보물을 불태워, 죽음으로 맞서 싸우려 했다. 문종이 구천을 말리며 ‘보아 하니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가 탐욕스러워 이익으로 그를 유혹할 수 있으니, 몰래 가서 이를 알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문종을 시켜 미녀와 보물을 몰래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백비가 이를 받고는 바로 대부 문종을 오왕에게 보였다. 문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왕께 원하옵건대 구천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보물을 다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구천은 그의 처자식을 다 죽이고 보물을 불태운 다음 5천 명을 모두 거두어 죽기로 싸울 것이니 (대왕께서도) 분명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라고 했다.
嚭因説呉王曰:「越以服為臣, 若将赦之, 此国之利也.」呉王将許之. 子胥進諫曰:「今不滅越, 後必悔之. 句践賢君, 種、蠡良臣, 若反国, 将為亂.」呉王弗聴, 卒赦越, 罷兵而帰.
비인설오왕왈 ‘월이보위신 약장사지 차국지리야’ 오왕장허지. 자서진간왈 ‘금불멸월 후필회지. 구천현군 종 려양신 약반국 장위란’ 오왕불청 졸사월 파병이귀.
이에 백비가 오왕에게 ‘월나라가 항복하여 신하가 되었으니 용서하시면 나라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오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오자서가 나아가 간하길 ‘지금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훗날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구천은 현명한 주군이고 문종과 범려는 좋은 신하들입니다. 저들에게 나라를 돌려주면 장차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직언했다. 오왕은 듣지 않고 끝내 월나라를 용서하고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句践之困会稽也, 喟然嘆曰:「吾終於此乎?」種曰:「湯繋夏台, 文王囚羑里, 晉重耳奔翟, 斉小白奔莒, 其卒王霸. 由是観之, 何遽不為福乎?」
구천지곤회계야 위연탄왈 ‘오종어차호’ 종왈 ‘탕계하대 문왕수유리 진중이분적 제소백분거 기졸왕패. 유시관지 하거불위복호’
구천이 회계산에서 포위당했을 때 ‘내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문종이 ‘탕(湯)나라는 하대(夏臺)에,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 갇혔었습니다. 중이(重耳)는 적(翟)나라으로, 소백(小白)은 거(莒)나라로 달아났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상황이) 복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呉既赦越, 越王句践反国, 乃苦身焦思, 置胆於坐, 坐臥即仰胆, 飲食亦嘗胆也. 曰:「女忘会稽之恥邪?」身自耕作, 夫人自織, 食不加肉, 衣不重采, 折節下賢人, 厚遇賓客, 振貧弔死, 與百姓同其勞. 欲使范蠡治国政, 蠡対曰:「兵甲之事, 種不如蠡;填撫国家, 親附百姓, 蠡不如種.」於是挙国政属大夫種, 而使范蠡與大夫柘稽行成, 為質於呉.
오기사월 월왕구천반국 내고신초사 치담어좌 좌와즉앙담 음식역상담야. 왈 ‘여망회계지치아’ 신자경작 부인자직 식불가육 의불중채 절절하현인 후우빈객 진빈조사 여백성동기로. 욕사범례치국정 례대왈 ‘병갑지사 종불여려 진무국가 친부백성 려불여종’ 어시거국정속대부종 이사범려여대부자계생성 위질어오.
오나라가 월나라를 용서하자, 월왕 구천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는데, 자리에 곰쓸개를 두고서 앉으나 누우나 쓸개를 올려다보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쓸개를 맛보았다. 그러면서 ‘네가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몸소 농사를 짓고 부인은 옷감을 짰다. 음식에 고기를 더하지 않았고, 옷은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체면을 내려놓고 유능한 인재를 우대하고, 빈객을 후하게 접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죽은 자를 조문하면서 백성들과 수고를 함께 했다. 범려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자 범려는 ‘군대 일이라면 문종이 범려만 못합니다만 나라를 단단히 어루만지고 백성을 따르게 하는 일이라면 범려가 문종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국정을 대부 문종에게 맡기고 범려와 대부 자계(柘稽)를 보내 담판을 짓고 오나라에 인질로 남게 했다.
二歳而呉帰蠡.
이세오귀려.
2년 뒤 오나라는 범려를 돌려보냈다.
句践自会稽帰七年, 拊循其士民, 欲用以報呉. 大夫逢同諫曰:「国新流亡, 今乃复殷給, 繕飾備利, 呉必懼, 懼則難必至. 且鷙鳥之撃也, 必匿其形. 今夫呉兵加斉、晉, 怨深於楚、越, 名高天下, 実害周室, 徳少而功多, 必淫自矜. 為越計, 莫若結斉, 親楚, 附晉, 以厚呉. 呉之志広, 必軽戦. 是我連其権, 三国伐之, 越承其弊, 可克也.」句践曰:「善.」
구천자회계귀칠년 부순기사민 욕용이보오. 대부봉동간왈 ‘국신유망 금내복은급 선식비리 오필구 구즉난필지. 차지조지격야 필익기형. 금부오병가제 진 원심어초 월 명고천하 실해주실 덕소이공다 필음자긍. 위월계 막약결제 친초 부진 이후오. 오지지광 필경전. 시아연기권 삼국벌지 월승기폐 가극야’ 구천왈 ‘선’
구천이 회계에서 돌아온 지 7년(기원전 487년)만에 군대와 백성을 잘 다독거려서 오나라에 보복하는데 쓰려고 했다. 대부 봉동(逢同)이 ‘나라가 얼마 전에 망했다가 이제 조금 넉넉해지려고 합니다. 군비를 정비하고 무기를 가다듬으면 오나라가 두려워 할 것이 뻔하고, 두려워하면 어려움이 닥치기 마련입니다. 무릇 매나 수리가 공격을 하려 할 때는 그 모습을 숨기는 법입니다. 지금 오나라는 제나라, 진(晉)나라에 병력을 더 보내고 있고, 초나라와 월나라는 한이 깊습니다. 명성이 천하에 높지만 실제로는 주나라 왕실에 해가 되고 있습니다. 덕은 적고 공은 많으니 분명 자기 멋대로 교만하게 굴 것입니다. 월나라를 위한 계책으로 말하자면 제나라와 결탁하고,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진(晉)나라에 의지하고, 오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입니다. 오나라의 야심이 커지면 싸움을 우습게 볼 것이 분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도권을 쥐고, 세 나라와 함께 오나라를 정벌하고, 우리 월나라는 오나라의 지친 틈을 이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직간했다. 구천이 ‘좋소!’라고 했다.
居二年, 呉王将伐斉. 子胥諫曰:「未可. 臣聞句践食不重味, 與百姓同苦樂. 此人不死, 必為国患. 呉有越, 腹心之疾, 斉與呉, 疥癬也. 願王釈斉先越.」呉王弗聴, 遂伐斉, 敗之艾陵, 虜斉高、国以帰. 譲子胥. 子胥曰:「王毋喜!」王怒, 子胥欲自殺, 王聞而止之.
거이년 오왕장벌제. 자서간왈 ‘미가 신문구천식불중미 여백성동고락. 차인불사 필위국환. 오유월 복심지질 제여오 개선야. 원왕석제선월’ 오왕불청 수벌제 패지애릉 노제고 국이귀. 야양자서. 자서왈 ‘왕무희’ 왕노 자서욕자살 왕문이지지.
2년이 지나자, 오나라 왕이 제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오자서가 ‘안 됩니다. 신이 듣기에 구천은 맛없는 음식을 먹고, 백성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 한답니다. 이 자가 죽지 않으면 틀림없이 우리나라의 근심이 됩니다. 오나라에게 월나라는 뱃속의 질병이지만 제나라는 오나라에게 옴 정도입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제나라는 놔두시고 월나라를 우선시하십시오.’라고 간언했다. 오왕이 듣지 않고 기어코 제나라를 정벌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를) 패배시키고 고장(高張)과 국하(國夏)를 포로로 잡아 돌아와서는 오자서를 나무랐다. 오자서가 ‘왕께서는 기뻐할 것 없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노했다. 오자서가 자살하려고 하자 왕이 이를 알고는 말렸다.
越大夫種曰:「臣観呉王政驕矣, 請試嘗之貸粟, 以卜其事.」請貸, 呉王欲與, 子胥諫勿與, 王遂與之, 越乃私喜. 子胥言曰:「王不聴諫, 後三年呉其墟乎!」
월대부종왈 ‘신관오왕정교의 청시상지대속 이복기사’ 청대 오왕욕여 자서간물여 왕수여지 월내사희. 자서언왈 ‘왕불청간 후삼년오기허호’
한편 월나라의 대부 문종은 ‘신이 보아하니 오왕의 다스림이 교만합니다. 시험삼아 양식을 빌려 달라고 하고, 그 일이 어찌 되는 지 예측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식량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오왕은 주려고 하는데, 오자서가 주지 말라고 했다. 오왕이 끝내 빌려주었고, 월나라는 은근히 기뻐했다. 오자서는 ‘왕이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3년 뒤면 오나라의 땅이 폐허가 되겠구나!’라고 했다.
太宰嚭聞之, 乃數與子胥争越議, 因讒子胥曰:「伍員貌忠而実忍人, 其父兄不顧, 安能顧王? 王前欲伐斉, 員彊諫, 已而有功, 用是反怨王. 王不備伍員, 員必為亂.」與逢同共謀, 讒之王. 王始不従, 乃使子胥於斉, 聞其託子於鮑氏, 王乃大怒, 曰:「伍員果欺寡人!」
태재백비문지 내수여자서쟁월의 인참자서왈 ‘오원모충이실인인 기부형불고 안능고왕 왕전욕벌제 원강간 이이유공 용시반원왕. 왕불비오원 원필위란’ 여봉동공모 참지왕. 왕시불종 내사자서어제 문기탁자어포씨 왕내대노 왈 ‘오원과사과인’
태재 백비가 이를 듣고는 오자서와 월나라에 대해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면서 오자서를 두고 ‘오원(오자서)이 보기는 충성스럽지만 실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와 형님도 돌보지 않는데 어찌 왕을 돌보겠습니까? 왕께서 전에 제나라를 치려고 하셨을 때 오원이 강력하게 말렸지요. 공을 세웠는데도 이 때문에 오히려 왕을 원망했습니다. 왕께서 오원에 대해 대비하지 않으면, 오원은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모함했다. 그리고는 봉동과 함께 모의하여 왕에게 오자서를 모함했다. 처음에 오왕은 이 말에 동조하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가 제나라에 가서 그 아들을 포목(鮑牧)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왕이 ‘오원이 정말 과인을 속였구나!’라며 크게 노했다.
役反, 使人賜子胥属鏤剣以自殺. 子胥大笑曰:「我令而父霸, 我又立若, 若初欲分呉国半予我, 我不受, 已, 今若反以讒誅我. 嗟乎, 嗟乎, 一人固不能独立!」報使者曰:「必取吾眼置呉東門, 以観越兵入也!」於是呉任嚭政.
역반 사인사자서촉루검이자살. 자서대소왈 ‘아영이부패 아우입약 약초욕분오국반여아 아불수 이 금약만이참주아. 차호 차호 일인고불능독립’ 보사자왈 ‘필위오안치오동문 이관월병입야’ 어시오임비정.
(제나라 정벌에서) 돌아오자 사람을 시켜 오자서에게 촉루검(屬鏤劍)을 주면서 자살하게 했다. 오자서가 크게 웃으며 ‘내가 네 아비를 패주로 만들었고, 내가 또 너를 세웠다. 네가 처음에 오나라를 반으로 나누어 내게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네가 오히려 모함의 말을 듣고 나를 죽이는구나. 오호라, 오호라! 혼자서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라 하고는 사신에게 ‘반드시 내 눈알을 파내 오나라 동문에 걸어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그리하여 오왕은 백비에게 정권을 맡겼다.
居三年, 句践召范蠡曰:「呉已殺子胥, 導諛者衆, 可乎?」対曰:「未可.」
거삼년 구천소범려왈 ‘오이살자서 도수자중 가호’ 대왈 ‘미가’
3년이 지나자, 구천은 범려를 불러 ‘오나라가 이미 오자서를 죽였고, 지금 그 주위에는 모두 아부만 일삼는 자들만 있이니 (공격하면) 되겠소?’라고 물었다. (범려가)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至明年春, 呉王北会諸侯於黄池, 呉国精兵従王, 惟独老弱與太子留守. 句践复問范蠡, 蠡曰「可矣」. 乃発習流二千人, 教士四萬人, 君子六千人, 諸御千人, 伐呉. 呉師敗, 遂殺呉太子.
지명년춘 오왕북회제후어황지 오국정병종왕 유독노약여태자유수. 구천복문범려 려왈 ‘사의’ 내발습유이천인 교사사만인 군자육천인 제어천인 벌오. 오사패 수살오태자.
이듬해 봄이 되자, 오왕은 북쪽 황지(黃池)에서 제후와 회맹했다. 오나라의 정예병은 왕을 따라 나섰고, 오로지 노약자와 태자만 남아 지키고 있었다. 구천이 범려에게 다시 묻자 범려는 가능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물에 익숙한 2천명, 훈련을 제대로 받은 4만명, 뜻이 굳센 군자(君子) 6천명, 근위 시종 1천명을 선발하여 오나라를 정벌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오나라의 태자를 죽였다.
呉告急於王, 王方会諸侯於黄池, 懼天下聞之, 乃袐之. 呉王已盟黄池, 乃使人厚礼以請成越. 越自度亦未能滅呉, 乃與呉平.
오고급어왕 왕방회제후어황지 구천하문지 내비지. 오왕이맹황지 내사인후례이청성월 월자도역미능멸오 내여오평.
오나라는 왕에게 급히 알렸다. 그때 오왕은 황지에서 제후들과 회맹 중이었는데 천하가 이 일을 알까 두려워 비밀에 부쳤다. 오왕이 황지 회맹을 마치고는 바로 사람을 보내 후한 예물로 월나라에 강화를 요청했다. 월나라는 아직 오나라를 멸망시킬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헤아려서 오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其後四年, 越复伐呉. 呉士民罷弊, 軽鋭尽死於斉、晉. 而越大破呉, 因而留囲之三年, 呉師敗, 越遂复棲呉王於姑蘇之山.
기후사년 월복벌오. 오사민파폐 경예진사어제 진. 이월대파오 인이유위지삼년 오사패 월수복서오왕어고소지산
그 뒤로 4년 만에 월나라가 다시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 오나라의 군사와 백성들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 정예병이 모두 제나라와 진(晉)나라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월나라는 오나라를 대파하고 3년 동안 포위했다. 오나라의 군대는 패했고, 월나라는 마침내 고소산(姑蘇山)으로 오왕을 몰아넣었다.
呉王使公孫雄肉袒膝行而前, 請成越王曰:「孤臣夫差敢布腹心, 異日嘗得罪於会稽, 夫差不敢逆命, 得與君王成以帰. 今君王挙玉趾而誅孤臣, 孤臣惟命是聴, 意者亦欲如会稽之赦孤臣之罪乎?」
오왕사송손웅육단슬행이전 청성월왕왈 ‘고신부차감시복심 이일상득죄어회계 부차불감역명 득여군왕성이귀. 금군왕거옥지이주고신 고신유명시청 의자역욕여회계지사고신지죄호’
오왕이 보낸 사신 대부 공손웅(公孫雄)은 웃통을 벗고 무릎으로 기어서 월왕에게로 다가가 강화를 요청하며 ‘오갈 데 없는 신 부차가 감히 속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지난 날 회계에서 죄를 지었을 때 이 부차는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고 왕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몸소 옥체를 움직여 신을 토벌하시니 신은 명을 받들 뿐입니다. 회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지요?’라고 전했다.
句践不忍, 欲許之. 范蠡曰:「会稽之事, 天以越賜呉, 呉不取. 今天以呉賜越, 越其可逆天乎? 且夫君王蚤朝晏罷, 非為呉邪? 謀之二十二年, 一旦而棄之, 可乎? 且夫天與弗取, 反受其咎. 『伐柯者其則不遠』, 君忘会稽之厄乎?」
구천불인 욕허지. 범려왈 ‘회계지사 천이월사오 오불취. 금천이오사월 월기사역천호 차부군왕조조안파 비위오아 모지이십이년 일단이기지 가호 차부천여불취 반수기구. “발기자기즉불원” 군망회계지액호’
구천은 차마 모질지 못해 받아들이려 했다. 범려가 ‘회계의 사건은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 맡긴 것인데 오나라가 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오나라를 월나라에 주려는 것인데 월나라가 어찌 하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왕께서 아침 일찍 조회를 하고 저녁 늦게 파한 것은 오나라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22년을 계획했는데 하루아침에 버린다니 될 말입니까? 하늘이 주시는 데도 받지 않으면 오히려 그 화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그 본이 멀지 않거늘”라는 (시경의) 구절이 있듯이 왕께서 회계의 재앙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라고 했다.
句践曰:「吾欲聴子言, 吾不忍其使者.」范蠡乃鼓進兵, 曰:「王已属政於執事, 使者去, 不者且得罪.」
구천왈 ‘오욕청자언 오불인기사자’ 범려내고진병 왈 ‘왕이속정어집사 사자거 불자차득죄’
구천은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르고 싶지만, 사신에게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소이다.’라 했다. 그러자 범려는 북을 울려 군대를 진격시키면서 ‘왕께서 이미 이 일을 내게 맡겼으니 사신을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죄를 받게 될 것이오!’라고 했다.
呉使者泣而去.
오사자읍이거.
오나라의 사신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句践憐之, 乃使人謂呉王曰:「吾置王甬東, 君百家.」呉王謝曰:「吾老矣, 不能事君王!」遂自殺. 乃蔽其面, 曰:「吾無面以見子胥也!」越王乃葬呉王而誅太宰嚭.
구천린지 내사인위오왕왈 ‘오치왕용동 군백가’ 오왕사왈 ‘오노의 불능사순왕’ 수자살/ 내폐기면 왈 ‘오무면이견자서야’ 월왕내장오왕이주태재비.
구천이 가엾게 여겨 곧 사람을 보내 오왕에게 ‘내가 왕을 용동(甬東)으로 보내 100가의 우두머리가 되도록 하겠소.’라고 했다. 오왕이 ‘내가 이미 늙어서 군왕을 섬길 수 없겠습니다.’라며 사양하고는 드디어 자살했다. 그때 그 얼굴을 가리게 하면서 ‘내가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라고 했다. 월왕은 바로 오왕을 장사지내고 태재 백비를 죽였다.
句践已平呉, 乃以兵北渡淮, 與斉、晉諸侯会於徐州, 致貢於周. 周元王使人賜句践胙, 命為伯. 句践已去, 渡淮南, 以淮上地與楚, 帰呉所侵宋地於宋, 與魯泗東方百里. 當是時, 越兵横行於江、淮東, 諸侯畢賀, 号称霸王.
구천이평오 내이병북도회 여제 진제후회어서주 치공어주. 주원왕사인사구천조 명위백 구천이거 도회남 이회상지여초 귀오소침송지어송 여노사동방백리. 당시시 월병횡행어강 회동 제후필하 오칭패왕.
구천이 오나라를 평정하고 바로 병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회하를 건너 제후 제나라, 진(晉)나라와 서주(徐州)에서 회맹하고 주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주나라 원왕(周元)은 사람을 시켜 구천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내리고 백(伯)에 임명했다. 구천은 철수하여 회하 남쪽을 건너 회하 위쪽 땅을 초나라에 주고, 침탈한 송나라의 땅을 돌려주고, 노나라에게는 사수(泗水) 동쪽 사방 100리 땅을 주었다. 당시 월나라의 군대가 장강과 회하 동쪽을 주름잡으니 제후들이 모두 축하를 드리며 패왕(覇王)이라고 칭했다.
范蠡遂去, 自斉遺大夫種書曰:「蜚鳥尽, 良弓蔵;狡免死, 走狗烹. 越王為人長頚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
범려수거 자제유대부종서왈 ‘비조진 양궁장 교토사 주구팽. 월왕위인자경조훼 가여공환란 불가여공락. 자하불거’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날던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감추고, 약은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이오. 월왕은 목은 길고 입은 뾰족하여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오.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소?’라고 했다.
種見書, 称病不朝. 人或讒種且作亂, 越王乃賜種剣曰:「子教寡人伐呉七術, 寡人用其三而敗呉, 其四在子, 子為我従先王試之.」種遂自殺.
종견서 칭병불조. 이혹참종차작란 월왕내사종검왈 ‘자교과인벌오칠술 과인용기삼이패오 기사재자 자위아종선왕시지’ 종수자살.
문종이 편지를 보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 문종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중상하자 구천은 문종에게 바로 검을 내리며 “그대가 과인에게 오나라를 정벌할 일곱 개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과인은 그중 세 가지만 사용하여 오나라를 물리쳤다. 나머지 넷은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선왕을 따라가서 그것을 시험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문종이 마침내 자살했다.
句践卒, 子王鼫與立. 王鼫與卒, 子王不寿立. 王不寿卒, 子王翁立. 王翁卒, 子王翳立. 王翳卒, 子王之侯立. 王之侯卒, 子王無彊立.
구천졸 자왕석여립. 왕석여졸 자왕불수립. 왕불수졸 자왕옹립. 왕옹졸 자왕예립. 왕예졸 자왕지후립. 왕지후졸 자왕무강립.
구천이 죽자 아들 석여(鼫與)가 왕으로 섰다. 석여가 죽자 아들 불수(不壽)가 왕이 되었다. 불수가 죽자 아들 옹(翁)이, 옹이 죽자 그의 아들 예(翳)가, 예가 죽자 아들 지후(之侯)가, 지후가 죽자 아들 무강(無彊)이 왕이 되었다.
<무강 이후의 월의 역사>
王無彊時, 越興師北伐斉, 西伐楚, 與中国争彊.
왕무강시 월흥사북벌제 서벌초 여중국쟁강.
무강 때 월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서쪽으로는 초나라를 정벌하며 중국과 힘을 다투었다.
當楚威王之時, 越北伐斉, 斉威王使人説越王曰:「越不伐楚, 大不王, 小不伯. 図越之所為不伐楚者, 為不得晉也. 韓、魏固不攻楚. 韓之攻楚, 覆其軍, 殺其将, 則葉、陽翟危;魏亦覆其軍, 殺其将, 則陳、上蔡不安. 故二晉之事越也, 不至於覆軍殺将, 馬汗之力不效. 所重於得晉者何也?」
당초위왕지시 월불벌제 제위왕사인설월왕왈 ‘월불벌초 대불왕 소불백 도월지소위불벌초자 위부득진야. 한 위고불공초. 한지공초 복기군 살기장 즉엽 양적위 위역복기군 살기장 즉진 상채불안. 고이진지사월야 부지어복군살장 마한지역불효. 소중어득진자하야’
초나라 위왕(威王) 때 월나라가 북으로 제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제나라 위왕(威王)이 사신을 보내 월왕에게 ‘월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크게는 왕이 될 수 없고 작게는 패주가 될 수 없습니다. 월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지 않는 까닭은 진(晉)나라, 즉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의 도움을 얻지 못해서입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본래 초나라를 공격하지 못 합니다. 한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했다간 그 군대가 무너지고 그 장수가 죽으니 엽(葉)과 양책(陽翟)이 위험해집니다. 위나라 역시 그 군대가 무너지고 장수가 죽으니 진(陳)과 상채(上蔡)가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한나라와 위나라가 월나라와 친해지려는 것입니다. 군대가 무너지고 장수가 죽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지 (월나라를 위하여) 힘을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데도 어째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중시하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越王曰:「所求於晉者, 不至頓刃接兵, 而況于攻城囲邑乎? 願魏以聚大梁之下, 願斉之試兵南陽莒地, 以聚常、郯之境, 則方城之外不南, 淮、泗之閒不東, 商、於、析、酈、宗胡之地, 夏路以左, 不足以備秦, 江南、泗上不足以待越矣. 則斉、秦、韓、魏得志於楚也, 是二晉不戦分地, 不耕而穫之. 不此之為, 而頓刃於河山之閒以為斉秦用, 所待者如此其失計, 柰何其以此王也!」
월왕왈 ‘소구어진자 부지돈인접병 이황우공성위읍호 원위이취대량지하 원제지시병남양거지 이취상 담지경 즉방성지외불남 회 사지한부동 상 어 석 역 종호지지 하로이좌 부족이비진 강남 사상부족이대월의. 즉제 진 한 위득지어초야 시이진부전분지 불경이획지. 부차지위 이돈인어하산지산이위제진용 소대자여차기실계 내하기이차왕야’
월왕은 ‘한나라와 위나라에 바라는 것은 나아가 군대로 싸우라는 것도 아닌데 하물며 성을 공격하고 읍을 포위하라는 것이겠는가? 위나라가 대량(大梁) 아래로 군대를 모으고, 제나라가 남양(南陽)과 거(莒) 땅에서 군을 훈련시켜 상(常)과 담(郯)의 경계에 집합시키는 것을 원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초나라가) 방성(方城)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회하와 사수 사이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지 못하며, 상(商), 오(於), 석(析), 역(酈), 종호(宗胡)의 땅과 하로(夏路) 서쪽 일대는 진(秦)나라를 방비하기에 부족하고, 강남과 사수에서는 월나라를 상대하기 부족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 진, 한, 위는 초에서 자신의 뜻을 얻을 수 있게 되고, 한나라와 위나라는 싸우지 않고도 땅을 나눠 가질 수 있고, 농사를 짓지 않고도 수확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황하와 화산(華山) 사이에서 병력을 소모하여 제나라와 진나라의 부림을 당할 것이다. (한과 위가) 하는 짓이 이렇게 실책을 범하고 있는데 이걸로 어찌 왕이 될 수 있겠는가?’라 했다.
斉使者曰:「幸也越之不亡也! 吾不貴其用智之如目, 見豪毛而不見其睫也. 今王知晉之失計, 而不自知越之過, 是目論也. 王所待於晉者, 非有馬汗之力也, 又非可與合軍連和也, 将待之以分楚衆也. 今楚衆已分, 何待於晉?」
제사자왈 ‘행야월지불망야 오불귀기용지지여목 견호소이불견기첩야. 금왕지진지실계 이불자지월지과 시목논야. 왕소대어진자 비유마한지력야 우비가여합군연화야 장대지이분초중야. 금초중이분 하대어진’
제나라의 사신은 ‘월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행운입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보는 지혜라면 인정할 수 없습니다. 눈은 터럭까지 보면서도 자기 속눈썹은 못 봅니다. 지금 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의 실책을 알면서도 월나라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방금 말씀드린) 눈이 사물을 보는 이치 즉 ‘목론(目論)’이라 것입니다. 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대하는 것은 힘을 다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군대를 합쳐 동맹하자는 것도 아닌, 그저 초나라의 병력을 분산시켜 달라는 정도입니다. 초나라의 병력이 이미 흩어졌는데 한나라와 위나라에 무엇을 더 바란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越王曰:「柰何?」曰:「楚三大夫張九軍, 北囲曲沃、於中, 以至無仮之関者三千七百里, 景翠之軍北聚魯、斉、南陽, 分有大此者乎? 且王之所求者, 鬥晉楚也;晉楚不鬥, 越兵不起, 是知二五而不知十也. 此時不攻楚, 臣以是知越大不王, 小不伯. 复讎、龐、長沙, 楚之粟也;竟沢陵, 楚之材也. 越窺兵通無仮之関, 此四邑者不上貢事於郢矣. 臣聞之, 図王不王, 其敝可以伯. 然而不伯者, 王道失也. 故願大王之転攻楚也.」
월왕왈 ‘내하’ 왈 ‘초삼대부장구군 북위곡옥 어중 이지무반지관자삼천칠백리 경위지군북취노 제 남양 분유대차자호. 차왕지소구자 투진초야 진초분투 월병불기 시지이오이부지십야. 차시불공초 신이시지월대불왕 소불백. 복수 방 장사 초지속야 경택릉 초지재야. 월규병용무반지관 차사읍자불상공사어영의. 신문지 도왕불왕 기폐가이백. 연이불백자 왕도실야. 고원대왕지전공초야’
월왕이 “어찌 하면 되는가?”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초나라의 세 대부가 군대를 아홉 길로 나누어 북으로는 곡옥(曲沃)과 오중(於中)을 포위하여 남으로 곧장 무가관(無假關)까지 이르니, 전선이 장장 3천 7백리에 이릅니다. 그리고 경취(景翠)가 통솔하는 군대는 북으로 노나라, 제나라 및 (한나라의) 남양(南陽) 일대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병력의) 분산으로 말하자면 이보다 더 크게 분산된 적이 있습니까? 또 왕께서 바라는 것은 한나라와 위나라가 초나라와 싸우는 것입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초나라와 싸우지 않으면 월나라의 군대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는 5가 두 개 있는 것만 알고 10이 하나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때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하시기 때문에 신이 크게는 왕이 될 수 없고 작게는 패주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수(讎), 방(龐), 장사(長沙)는 초나라의 식량 생산지이고 경택릉(竟澤陵)은 초나라의 목재가 많이 나는 곳입니다. 월나라가 군대를 내보내 무가관을 차지하기만 하면 이 네 지역은 더 이상 수도 영(郢)으로 공물을 보낼 수 없게 됩니다. 신이 듣기에 왕이 되려다 왕이 되지 못하면 적어도 패주는 되지만, 패주도 못 된다는 것은 왕도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초나라를 공격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십시오.”라고 했다.
於是越遂釈斉而伐楚. 楚威王興兵而伐之, 大敗越, 殺王無彊, 尽取故呉地至浙江, 北破斉於徐州. 而越以此散, 諸族子争立, 或為王, 或為君, 浜於江南海上, 服朝於楚.
어시월수석제이벌초. 초위왕흥병이벌지 대패월 살왕무강 진취고오지지절강 북파제어서주. 이월이차산 제족자쟁립 혹위왕 혹이군 병어강남해상 복조어초.
이에 월나라는 제나라를 포기하고 초나라를 정벌했다. 초나라 위왕은 군대를 일으켜 월나라를 쳐서 대파하고 왕 무강을 죽인 다음 오나라 땅에서 절강(浙江)에 이르는 곳을 모두 취했다. 북으로는 서주에서 제나라를 격파했다. 그리고 월나라는 이 때문에 왕족의 자제들이 자리를 다투니 어떤 자는 왕으로, 어떤 자는 군으로 자청하면서 강남 바닷가에 흩어져 초나라에 복속했다.
後七世, 至閩君揺, 佐諸侯平秦. 漢高帝复以揺為越王, 以奉越後. 東越, 閩君, 皆其後也.
후칠세 지민군요 좌제후평진. 한고제복이요위월왕 이봉월후. 동월 민군 개기후야.
이후 일곱 세대가 지나 민군(閩君) 요(搖)에 이르러서는 제후를 도와 진(秦)나라를 평정하려 했다. 한나라 고제(高帝, 유방)가 다시 요를 월왕으로 삼아 월나라의 뒤를 잇도록 했다. 동월(東越)과 민군(閩君)이 모두 그 후예들이다.
至楚, 荘生家負郭, 披藜藋到門, 居甚貧. 然長男発書進千金, 如其父言. 荘生曰:「可疾去矣, 慎毋留! 即弟出, 勿問所以然.」長男既去, 不過荘生而私留, 以其私齎献遺楚国貴人用事者.
지초 장생가부곽 피여조도문 거심빈. 연장남발서진천금 여기부언. 장생왈 ‘가질거의 신무류 즉제출 물문소이연’ 장남기거 불과장생이사류 이기사재헌윤초국귀인용사자.
초나라에 도착했다. 장생의 집은 성 근처였는데 잡초가 집 주위로 잔뜩 자라고 있었고 집안이 몹시 가난했다. 그러나 큰아들은 편지와 천금을 건넸다. 장생은 ‘여기 머무르지 말고 빨리 가라하고, 또 동생이 (감옥에서) 나오거든 그 자초지종을 묻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큰아들은 장생의 집에서 떠나왔지만 다시 장생 집에 가지 않고 몰래 머무르면서 자기가 가져간 황금을 초나라 권력자에게 바쳤다.
荘生雖居窮閻, 然以廉直聞於国, 自楚王以下皆師尊之. 及朱公進金, 非有意受也, 欲以成事後复帰之以為信耳. 故金至, 謂其婦曰:「此朱公之金. 有如病不宿誡, 後复帰, 勿動.」而朱公長男不知其意, 以為殊無短長也.
장생수거궁염 연이염직문어국 자초왕이하걔사존지. 내주공진금 비유의수야 욕이성사후복귀지이위신이. 고금지 위기부왈 ‘차주공지금 유여병불숙성 후복귀 물동’ 이주공장남부지기의 이위수무단장야.
장생이 비록 누추한 곳에 살고 있었지만 청렴하고 강직한 것이 나라에 알려져 초나라 왕 이하 모두가 그를 스승으로 존중했다. 도주공이 금을 보내오자 그것을 받으려는 뜻이 아니라 일이 이루어진 뒤 다시 돌려주어 신의를 보이려 했다. 그래서 금을 받자 부인에게 ‘이건 도주공의 금이요. 갑자기 병이 나서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나중에 다시 돌려 줄 것이니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했다. 도주공의 큰아들은 장생의 생각을 모르고 그에게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으로 여겼다.
荘生閒時入見楚王, 言「某星宿某, 此則害於楚」. 楚王素信荘生, 曰:「今為柰何?」荘生曰:「独以徳為可以除之.」楚王曰:「生休矣, 寡人将行之.」王乃使使者封三銭之府. 楚貴人驚告朱公長男曰:「王且赦.」曰:「何以也?」曰:「毎王且赦, 常封三銭之府. 昨暮王使使封之.」
장생한시입견초왕 언 ‘모성수모 차즉해어초’ 초왕소신장생 왈 ‘금위내하’ 장생왈 ‘독이덕위가이제지’ 초왕왈 ‘생휴의 과인장행지’ 왕내사사자봉삼전지부. 초귀인경고주공장남왈 ‘왕차사’ 왈 ‘하이야’ 왈 ‘매왕차사 상봉삼전지부 작모왕사사봉지’
장생은 틈을 봐서 (궁으로) 들어가 초왕을 만나 ‘어떤 별자리로 들었는데 이는 초나라에 해가 됩니다.’라고 했다. 왕이 평소 장생을 믿기에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소?’라고 했다. 장생이 ‘오직 덕을 베푸셔야만 이 악운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라 했다. 초왕이 ‘선생께서는 돌아가 편히 계십시오. 과인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곧 사신을 시켜 금, 은, 동 삼전(三錢)의 창고를 봉쇄했다. (큰아들에게 뇌물을 받은) 초나라 권력자는 깜짝 놀라 도주공의 큰아들에게 ‘왕이 사면령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니 ‘어찌 그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왕께서 사면령을 내리실 때면 늘 삼전의 창고를 봉쇄하시는데 어제 저녁 사람을 시켜 봉쇄했습니다.’라고 했다.
朱公長男以為赦, 弟固當出也, 重千金虚棄荘生, 無所為也, 乃复見荘生. 荘生驚曰:「若不去邪?」長男曰:「固未也. 初為事弟, 弟今議自赦, 故辞生去.」荘生知其意欲复得其金, 曰:「若自入室取金.」長男即自入室取金持去, 独自歓幸.
주공장남이위사 제고당출야 중천금허렵장생 무소위야 내복견장생. 장생경왈 ‘약불거아’ 장남왈 ‘고미야 초위사제 제금의자사 고사생거’ 장생지기의욕복득기금 왈 ‘약자입실취금’ 장남즉자입실취금지거 독자환행.
도주공의 큰아들은 사면이 내려지면 동생도 당연히 나올 텐데 천금을 장생에게 줄 필요없다 싶어 다시 장생을 찾아갔다. 장생이 놀라며 ‘아직 안 갔는가?’라고 했다. 주공의 장남이 ‘아직 안 갔습니다. 당초 동생 일로 왔는데 지금 사면이 논의되고 있다 해서 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가려 합니다.’라고 했다. 장생은 그가 황금을 다시 가져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자네, 방에 들어가 황금을 가져가게나.’라고 했다. 큰아들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황금을 가지고 떠나면서 혼자 좋아 어쩔 줄 몰랐다.
荘生羞為児子所売, 乃入見楚王曰:「臣前言某星事, 王言欲以修徳報之. 今臣出, 道路皆言陶之富人朱公之子殺人囚楚, 其家多持金銭賂王左右, 故王非能恤楚国而赦, 乃以朱公子故也.」
장생치위아자소매 내입견초왕왈 ‘신전언모성사 왕언욕이수덕보지 금신출 도로개언도지부인주공지자살인수초 기가다지금전뇌왕좌우 고왕비능휼초국이사 내이주공자고야’
장생이 도주공의 아들에게 모욕당한 것이 부끄러워 곧 들어가 초왕을 만나 ‘신이 일전에 별자리 이야기를 드렸더니 왕께서는 덕을 베풀어 (하늘에) 보답하려 하셨습니다. 지금 신이 밖에 나가 길에서 하는 말을 들으니 부자 도주공의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에 갇혀 있는데 그 집에서 금전을 많이 갖고 와서 왕의 측근에게 뇌물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께서 초나라를 아껴서가 아니라 도주공 아들 때문에 사면을 내리려 한다고 말입니다.’라고 했다.
楚王大怒曰:「寡人雖不徳耳, 柰何以朱公之子故而施恵乎!」令論殺朱公子, 明日遂下赦令. 朱公長男竟持其弟喪帰.
초왕대노왈 ‘과인수부덕이 내하이주공지자고이시혜호’ 영논살주공지 명일수하사령. 주공장남경지기지상귀.
왕은 크게 노하며 ‘과인이 아무리 부덕하기로서니 어찌 도주공의 아들 때문에 은혜를 베푼단 말이오!’라 하고는 명을 내려 도주공의 아들을 죽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면령을 내렸다. 도주공의 큰아들은 결국 동생의 시신을 가지고 돌아갔다.
至, 其母及邑人尽哀之, 唯朱公独笑, 曰:「吾固知必殺其弟也! 彼非不愛其弟, 顧有所不能忍者也. 是少與我倶, 見苦, 為生難, 故重棄財. 至如少弟者, 生而見我富, 乗堅駆良逐狡免, 豈知財所従來, 故軽棄之, 非所惜吝. 前日吾所為欲遣少子, 固為其能棄財故也. 而長者不能, 故卒以殺其弟, 事之理也, 無足悲者. 吾日夜固以望其喪之來也.」
지 기모급읍인진애지 유주공독소왈 ‘오고지필살기제야 피비불애기제 고유소불능인자야 시소여아구 견고 위생란 고중엽재. 지여소제자 생이견아부 승견구양수교토 아자쟈소종래 고셩엽지 비소석린. 전일오소위욕견소자 고위기능엽재고야. 이장자불능 고졸이살기제 사지리야 무족비자. 오일야고이망기상지래야’
도착하니 그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는데 도주공 혼자만 웃으면서 ‘내가 동생을 죽게 할 줄 알았다! 저 녀석이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뭔가를 차마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고생하고 생활의 곤란을 겪어서 재물을 쓸 줄 모른다. 막내 놈은 태어나면서 내가 잘 사는 것을 보고 좋은 마차에 토끼 사냥이나 하고 다녔으니 그 재물이 어디서 오는 줄 모르기 때문에 가볍게 버리고 아까워하지 않는다. 일전에 내가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도 그 놈은 재물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큰 놈은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동생을 죽게 한 것이다. 사물의 이치가 참으로 이러함이 슬픈 일 일 뿐 내가 낮밤으로 둘째의 시신이 오길 기다렸노라.’라고 했다.
故范蠡三徙, 成名於天下, 非苟去而已, 所止必成名. 卒老死于陶, 故世傳曰陶朱公.
고범려삼사 성명어천하 비구거이이 소지필성명. 졸노사우도 고세전왈도주공.
범려는 세 번을 옮기고도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구차해져 옮긴 게 아니라 가는 곳마다 반드시 명성을 날렸다. 늙어 도나라에서 죽으니 세상에는 도주공이라 전해온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禹之功大矣, 漸九川, 定九州, 至于今諸夏艾安. 及苗裔句践, 苦身焦思, 終滅彊呉, 北観兵中国, 以尊周室, 号称霸王. 句践可不謂賢哉! 蓋有禹之遺烈焉. 范蠡三遷皆有栄名, 名垂後世. 臣主若此, 欲毋顕得乎!
태사공왈 우지공대의 점구천 정구주 지우금제하애안. 급묘예구천 고신초사 종멸강오 북관병중국 이존주실 호칭패왕. 구천가불위현재 개유우지유열언. 범려삼천개유영명 명수후세, 신주약차 욕무현득호‘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하우(夏禹)씨의 공이 크구나! 아홉 개의 하천을 소통시키고 아홉 개의 주를 안정시키니, 지금까지 중원이 편안하도다. 그 후손 구천(句踐)에 이르러 강한 인내력으로 끝내 강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가 북으로는 중국에까지 이르러 주 왕실을 받들고 패왕으로 칭했다. 구천을 유능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개 우가 남긴 덕이 아니겠는가? 범려가 세 번을 옮기고도 모두 영예로운 이름을 얻어 후세에게까지 남겼다. 신하와 군주가 이러했으니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