範睢
範睢者, 魏人也, 字叔. 遊説諸侯, 欲事魏王, 家貧無以自資, 乃先事魏中大夫須賈.
범수자 위인야 자숙. 유세제후 욕사위왕 가빈무이자자 내선사위중대부수고.
범수(范睢)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를 숙(叔)이라 했다. 범수는 제후들에게 유세하며 위왕을 섬기려 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활동 경비를 마련할 수 없어 먼저 위나라의 중대부 수고(須賈)를 섬겼다.
須賈為魏昭王使於斉, 範睢従. 留數月, 未得報. 斉襄王聞睢辯口, 乃使人賜睢金十斤及牛酒, 睢辭謝不敢受. 須賈知之, 大怒, 以為睢持魏國陰事告斉, 故得此饋, 令睢受其牛酒, 還其金.
수고위위소왕사어제 범수종. 유수월 미득보. 제양왕문수변구 내사인사수슴십근금우주 수사사불감수. 수고지지 대노 이위수지위국음사고제 고즉차궤 영수수기우주 환기금.
수고가 위 소왕(昭王)의 사신으로 제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범수가 수행했다. 몇 달을 체류했으나 회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제 양왕(襄王)은 범수가 언변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 열 근의 금과 소, 술을 보냈다. 범수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수고가 이를 알고는 크게 노했다. 범수가 위나라의 은밀한 일을 알렸기 때문에 이런 선물을 받았다고 여겨서 범수에게 소와 술은 받되 금은 돌려주게 했다.
既帰, 心怒睢, 以告魏相. 魏相, 魏之諸公子, 曰魏斉. 魏斉大怒, 使舎人笞撃睢, 折脅摺歯. 睢詳死, 即巻以簀, 置廁中. 賓客飲者酔, 更溺睢, 故僇辱以懲後, 令無妄言者.
기귀 심노구 이고위상. 위상 위지제공자 왈위제. 위제대노 사사인태격수 절협접치.수상사 즉권이책 치측중. 빈객음자취 갱닉수 고육욕이징후 영무망언자.
돌아와서 (수고는) 마음으로 범수를 미워하여 위나라의 재상에게 이를 보고했다. 위나라의 재상은 위나라의 공자들 중 하나인 위제(魏齊)였다. 위제는 크게 화를 내며 사인(舍人)을 시켜 범수에게 매질을 가해 갈비뼈와 이빨을 부러뜨렸다. 범수가 죽은 척하자 대자리로 말아서 변소에다 버렸다. 술에 취한 빈객들이 범수에게 돌아가며 오줌을 갈겼다. 부러 모욕을 주어 뒷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징계로 삼았다.
睢従簀中謂守者曰:「公能出我, 我必厚謝公.」守者乃請出棄簀中死人. 魏斉酔, 曰:「可矣.」範睢得出. 後魏斉悔, 複召求之. 魏人鄭安平聞之, 乃遂操範睢亡, 伏匿, 更名姓曰張祿.
수종책중위수자왈 ‘공능출아 아필후사공’ 수자내청물기책중사인. 위제취 왈 ‘가의’ 범수득출. 후위제회복소구지. 위인정안평문지 내수조범수망 복닉 경명성왈장록.
범수는 자리에 싸인 채 간수에게 ‘그대는 날 탈출시킬수 있으니 내 반드시 그대에게 크게 갚을 것이오.’라고 했다. 간수는 바로 위제에게 대자리 안의 시신을 버려야겠다고 청했다. 위제는 술에 취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범수가 탈출했다. 위제가 후회가 되어 다시 사람을 불러 범수를 찾게 했다. 위나라 사람 정안평(鄭安平)이 이를 듣고 바로 범수를 데리고 도망쳐서 숨긴 다음 성과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고치게 했다.
當此時, 秦昭王使謁者王稽於魏. 鄭安平詐為卒, 侍王稽. 王稽問:「魏有賢人可與倶西遊者乎?」鄭安平曰:「臣里中有張祿先生, 欲見君, 言天下事. 其人有仇, 不敢晝見.」王稽曰:「夜與倶來.」鄭安平夜與張祿見王稽. 語未究, 王稽知範睢賢, 謂曰:「先生待我於三亭之南.」與私約而去.
탕차시 진소왕사알자왕계어위. 정안평사위졸 시왕계. 왕계문 ‘위유현인가여구서유자호?’ 정안평왈 ‘신리중유장록선생 욕견군 언천하사. 기인유구 불감주견’ 왕계왈 ; ‘야여구래’ 정안평야여장록견왕계. 어미구 왕계지범수현 위왈 ‘선생대아어삼정지남’ 여사약이거.
이때, 진(秦) 소왕(昭王)이 알자(謁者) 왕계(王稽)를 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정안평은 포졸로 위장하여 왕계를 모셨다. 왕계가 ‘위나라에 나와 함께 서쪽으로 유세할 만한 유능한 사람이 있소?’라고 물었다. 정안평이 ‘신의 마을에 장록 선생이 있는데 군을 만나 천하의 일을 말씀드리고 싶어 합니다만 그 사람에게 원수가 있어 낮에는 함부로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왕계는 ‘밤에 함께 오시오’라고 했다. 정안평이 밤에 장록과 함께 왕계를 만났다.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왕계는 범수가 유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선생께서는 삼정(三亭) 남쪽에서 나를 기다리시오’라는 은밀한 약속을 하고 떠났다.
王稽辭魏去, 過載範睢入秦. 至湖, 望見車騎従西來. 範睢曰:「彼來者為誰?」王稽曰:「秦相穣侯東行県邑.」
왕계사위거 과재범수입진. 지로 망견거기종서래. 범수왈 ‘피래자위수?’ 왕계왈 ‘진상양후동행현읍’
왕계가 인사를 하고 위를 떠나 지나가다가 범수를 태우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호현(湖縣)에 이르자 서쪽에서 마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 범수가 ‘저기 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하자 왕계는 ‘진나라의 재상 양후(穰侯)가 동쪽의 현과 읍을 순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範睢曰:「吾聞穣侯専秦権, 悪內諸侯客, 此恐辱我, 我寧且匿車中.」有頃, 穣侯果至, 勞王稽, 因立車而語曰:「関東有何変?」曰:「無有.」又謂王稽曰:「謁君得無與諸侯客子倶來乎? 無益, 徒亂人國耳.」王稽曰:「不敢.」即別去.
범수왈 ‘오문양후전진권 오내제후객 차공욕아 아녕차닉거중’ 유경 양후과지 노왕계 인립거이어왈 ‘관동유하변?’ 왈 ‘무유’ 우위왕계왈 ‘알군득무여제후객자구래호? 무익 도란입국이’ 왕계왈 ‘불감’ 즉별거.
범수가 ‘제가 듣기에 양후가 진나라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제후국 빈객들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던데, 저 사람이 저를 욕보일지 모르니 저는 잠시 수레에 숨어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윽고 양후가 정말 다가와서 왕계를 위로하면서 수레를 멈추고는 ‘관동(關東)에 무슨 변화가 있소?’라고 하자 왕계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또 왕계에게 ‘알자 그대도 제후의 유세객 따위를 데리고 온 것은 아니겠죠? 무익하고 백성과 나라를 어지럽힐 뿐이오.’라고 했다. 왕계는 ‘어찌 감히’라 하고는 바로 헤어져 자리를 떠났다.
範睢曰:「吾聞穣侯智士也, 其見事遅, 郷者疑車中有人, 忘索之.」於是範睢下車走, 曰:「此必悔之.」行十餘里, 果使騎還索車中, 無客, 乃已. 王稽遂與範睢入鹹陽.
범수왈 ‘오문양후지사야 기견사지 향자의거중유인 망색지’ 어시범수하거주 왈 '차필회지' 행십여리 과사기환색거중 무객 내이 왕계수여범수입함양.
범수는 ‘제가 듣기에 양후가 지혜롭다고 하더니 일에 대한 반응이 늦군요. 방금 수레 안에 사람이 있는지 의심해놓고 수색하는 것은 잊었으니 말입니다.’라 했다. 그리고 범수는 수레에서 내려 걸으면서 ‘저 사람이 틀림없이 후회할 겁니다.’라고 했다. 10여 리쯤 가자 과연 기마병을 시켜 수레를 다시 뒤졌다. 유세객이 없자 그만두었다. 왕계는 마침내 범수와 함께 함양에 들어왔다.
已報使, 因言曰:「魏有張祿先生, 天下辯士也. 曰『秦王之國危於累卵, 得臣則安. 然不可以書傳也』. 臣故載來.」秦王弗信, 使舎食草具. 待命歳餘.
이보사 인언왈 ‘위유장록선생 천하변사야. 왈 “진왕지국위어누란 득신즉안. 연불가이서전야” 신고재래’ 진왕불신 사사식초구. 대명세여.
(왕계는) 사신 갔다 온 일을 보고하는 틈을 타서 ‘위나라에 장록선생이란 분이 있는데 천하의 변사(유세가)입니다. 그가 말하길 “진왕의 나라가 달걀을 쌓아놓은 듯 위태로운데 신하를 얻으면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글로는 전할 수 없습니다.”라 하길래 신이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진왕은 믿지 않아 객사와 보잘 것 없는 식사를 갖추어 주게 했다. 그렇게 1년 넘게 명을 기다렸다.
當是時, 昭王已立三十六年. 南抜楚之鄢郢, 楚懐王幽死於秦. 秦東破斉. 湣王嘗稱帝, 後去之. 數困三晉. 厭天下辯士, 無所信.
당시시 소왕이립삼십육년. 남발초지언영 초회왕유사어진. 진동파제. 민왕상칭제 후거지. 수곤삼진. 염천하변사 무소신.
당시는 소왕이 즉위한 지 36년이 지났다. 남으로 초나라의 언영을 빼앗았고, 초 회왕은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죽었다. 진나라는 동쪽으로 제나라를 격파했다. 제 민왕이 한때 제(帝)로 자칭하다가 그 뒤에 포기했다. 여러 차례 삼진(한, 조, 위)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천하의 변사를 싫어하여 믿지 않았다.
穣侯, 華陽君, 昭王母宣太後之弟也;而涇陽君、高陵君皆昭王同母弟也. 穣侯相, 三人者更將, 有封邑, 以太後故, 私家富重於王室. 及穣侯為秦將, 且欲越韓、魏而伐斉綱壽, 欲以広其陶封. 範睢乃上書曰:
양후 황양군 소왕모선태후지제야; 이경양군 고릉군개소왕동모제야. 양후상 삼인자경장 유봉읍 이태후고 사가부중어왕실. 금양후위진장 차욕월한 위이벌제강수 욕이광기도봉 범수내상서왈:
양후(穰侯)와 화양군(華陽君)은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이었고, 경양군(涇陽君)과 고릉군(高陵君)은 소왕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었다. 양후는 재상이 되고, 세 사람은 돌아가며 장군이 되어 봉읍을 가졌고, 태후 때문에 각자 집안의 부가 왕실보다 더 부유했다. 양후가 진의 장수가 되어서는 한, 위나라를 넘어 제나라의 강읍(綱邑)과 수읍(壽邑)을 공격해 자신의 봉읍인 도읍(陶邑)을 넓히고자 했다. 범수가 이에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臣聞明主立政, 有功者不得不賞, 有能者不得不官, 勞大者其祿厚, 功多者其爵尊, 能治衆者其官大. 故無能者不敢當職焉, 有能者亦不得蔽隠. 使以臣之言為可, 願行而益利其道;以臣之言為不可, 久留臣無為也.
신문명주립정 유공자부득불상 유능자부득불관 노대자기록후 공다자기작존 능치중자기관대. 고무능자불감당직언 유능자역부득폐은. 사이신지언위가 원행이익이기도; 이신지언위불가 구유신무위야.
신이 듣기에 현명한 군주가 정치를 하면 공이 있는 사람은 상을 받을 수밖에 없고 능력이 있는 자는 관직을 얻지 않을 수 없으며, 공로가 큰 사람은 후한 녹봉을 받으며, 공이 많은 사람은 귀한 작위를 얻게 되며,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는 높은 벼슬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재능이 없는 자는 감히 관직을 맡지 못하고, 능력이 있는 자 또한 그 능력을 감추지 못합니다. 신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실행하여 다스림에 이익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신의 말씀이 옳지 않다면 신을 이곳에 머물게 해봤자 쓸모가 없습니다.
語曰:「庸主賞所愛而罰所悪;明主則不然, 賞必加於有功, 而刑必斷於有罪.」今臣之胸不足以當椹質, 而要不足以待斧鉞, 豈敢以疑事嘗試於王哉! 雖以臣為賎人而軽辱, 獨不重任臣者之無反複於王邪?
어왈 ‘용주상소애이벌소악; 명주즉불연 상필가어유공 이형필단어유죄’ 금신지흉부족이당심질 이요부족이대부월 이감이의사상시어왕재! 수이신위천인이경욕 독부중임신자지무반복어왕야?
속담에 ‘못난 군주는 자신이 예뻐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 영명한 군주는 그렇지 않으니 상은 반드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고, 형벌은 반드시 죄가 있는 자에게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지금 신의 가슴은 형틀을 감당하기에 부족하고, 허리는 큰 도끼를 받기에 부족한데 어찌 감히 확실치 않은 일로 왕을 시험하겠습니까? 신은 천한 자라 신을 경시하고 욕을 보인다 하더라도 신을 중용한 사람이 왕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且臣聞周有砥砨, 宋有結綠, 梁有県藜, 楚有和樸, 此四寶者, 土之所生, 良工之所失也, 而為天下名器. 然則聖王之所棄者, 獨不足以厚國家乎?
차신문주유지액 송유결록 양유현려 초유화박 차사현자 사지소생 영공지소실야 이위천하명기. 연즉성왕지소기자 독부족이후국가호?
신은 주(周)나라에는 지액(砥砨)이, 송(宋)나라에는 결록(結綠)이, 양(梁)나라에는 현려(縣藜)가, 초(楚)나라에는 화박(和朴)이라는 흙에서 난 네 보물이 있었는데 뛰어난 장인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천하의 이름난 기물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왕에게 버림받은 자라고 해서 유독 나라에 도움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臣聞善厚家者取之於國, 善厚國者取之於諸侯. 天下有明主則諸侯不得擅厚者, 何也? 為其割栄也. 良醫知病人之死生, 而聖主明於成敗之事, 利則行之, 害則舎之, 疑則少嘗之, 雖舜禹複生, 弗能改已
신문선후가자취지어국 선후국자취지어제후. 천하유명주즉제후부득천후자 하야? 위기할영야. 양의지병인지사생 이성주명어성패지사 이즉행지 해즉사지 의즉소상지 수순우복생 불능개이.
신은 집안을 부유하게 할 사람은 나라에서 취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할 사람은 제후들에게서 취한다고 들었습니다. 천하에 영명한 군주가 있으면 제후들이 마음대로 부유해질 수 없는데 왜 그렇겠습니까? 군주가 제후의 권력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의사가 환자의 생사를 알듯이 성군은 일의 성공과 실패를 잘 살펴서 이익이 되면 실행하고 손해가 되면 버리며, 의심스러우면 작게 시험해봅니다. 이는 순이나 우 임금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語之至者, 臣不敢載之於書, 其淺者又不足聴也. 意者臣愚而不概於王心邪? 亡其言臣者賎而不可用乎? 自非然者, 臣願得少賜遊観之閒, 望見顔色. 一語無效, 請伏斧質.
어지지자 신불감재지어서 기천자우부족청야. 의자신우이불개어왕심야? 망기언신자천이불가용호? 자비연자 신원득소사유관지간 망견안색. 일어무효 청복부질.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신이 감히 글에 담지 못했으며, 천박한 말들은 또 들으시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신이 어리석어 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을 추천한 사람이 천해서 믿을 수 없으신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신은 (왕께서) 한가한 틈을 타서 잠시 얼굴이라도 뵙길 원하옵니다. 단 한 마디라도 쓸모가 없으면 도끼날 위에 엎어질 것입니다.”
於是秦昭王大説, 乃謝王稽, 使以傳車召範睢.
어시진소왕대열 내사왕계 사이전거소범수.
이에 진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곧 왕계에게 사과하고 전거(傳車)를 보내 범수를 불렀다.
於是範睢乃得見於離宮, 詳為不知永巷而入其中. 王來而宦者怒, 逐之, 曰:「王至!」範睢繆為曰:「秦安得王? 秦獨有太後、穣侯耳.」欲以感怒昭王.
어시범수내득견어이궁 상위부지영항이입기중. 왕해이환자노 축지 왈 ‘왕지!’ 범수류위왈 ‘진안득왕? 진독유채후 양후이’ 욕이감노소왕.
이에 범수는 이궁(離宮)에서 (왕을) 만나게 되었는데 일부러 길을 모르는 척 내궁을 들어갔다. 왕이 도착하자 환관이 화를 내며 범수를 내쫓으면서 “왕께서 이르셨다”고 했다. 범수는 자기 멋대로 “진나라에 왕이 어디 있느냐? 진나라에는 오직 태후와 양후만 있을 뿐이지.”라고 지껄여서 소왕을 화나게 하려고 했다.
昭王至, 聞其與宦者爭言, 遂延迎, 謝曰:「寡人宜以身受命久矣, 會義渠之事急, 寡人旦暮自請太後;今義渠之事已, 寡人乃得受命. 竊閔然不敏, 敬執賓主之禮.」範睢辭譲.
소왕지 문기여환자쟁언 수정영 사왈 ‘과인의이신수명구의 회의거지사급 과인단모자청태후; 금의거지사이 과인내득수명. 규문연불민 경집빈주지례’ 범수사양.
소왕이 도착해서 범수가 환관과 말다툼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를 맞이하여 ‘과인이 일찌감치 몸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데 의거(義渠)의 일이 급하고, 과인이 또 아침저녁으로 몸소 태후의 명을 받아야 해서요. 지금 의거의 일이 마무리되어 과인이 이에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몸이 어리석고 민첩하지 못하나 삼가 주객의 예로 모시고자 합니다.’라며 사과했다. 범수는 거절했다.
是日観範睢之見者, 群臣莫不灑然変色易容者.
시일관범수지견자 군신막불여연변색역용자.
이날 범수의 접견을 본 신하들로서 숙연하게 얼굴색을 바꾸지 않는 자는 없었다.
秦王屏左右, 宮中虛無人. 秦王跽而請曰:「先生何以幸教寡人?」範睢曰:「唯唯.」有閒, 秦王複跽而請曰:「先生何以幸教寡人?」範睢曰:「唯唯.」若是者三. 秦王跽曰:「先生卒不幸教寡人邪?」範睢曰:
진왕병좌우 궁충허무인. 진왕기유청왈 ‘선생하이행교과인?’ 범수왈 ‘유유’ 유간 진왕복기유청왈 ‘선생하이행교과인?’ 범수왈: ‘유유; 약시자삼. 진왕기왈 ’선생졸불행교과인야?‘ 범수왈:
진왕은 좌우를 물리치고 궁중에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 진왕은 무릎을 꿇고 ‘선생께서는 과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는지요?’라고 청했다. 범수는 ‘네, 네’라고만 했다. 잠시 뒤 진왕은 다시 무릎을 꿇으며 ‘선생께서는 과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는지요?’라고 청했다. 범수는 또 ‘네, 네’라고만 했다. 이렇게 하길 세 번이나 했다. 진왕이 무릎을 꿇으며 ‘선생께서는 끝내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하자 범수는 이렇게 말했다.
「非敢然也. 臣聞昔者呂尚之遇文王也, 身為漁父而釣於渭浜耳. 若是者, 交疏也. 已説而立為太師, 載與倶帰者, 其言深也. 故文王遂収功於呂尚而卒王天下. 郷使文王疏呂尚而不與深言, 是周無天子之徳, 而文武無與成其王業也.
‘비감연야. 신문석자여상지우문왕야 신위어부이조어위병이. 약시자 교소야. 이세이립위태사 재여구귀자 기언심야. 고문왕수수공어여상이졸왕천하. 향사문왕소여상이불여심언 시주무천자지덕 이문무무여성기왕업야.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듣기에 옛날 여상(呂尙)이 문왕(文王)을 만났을 때 그는 어부로서 위수에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그처럼 멀었습니다만 이야기를 나누고는 태사(太師)로 세우고 수레에 함께 태워 돌아왔을 만큼 그 말이 깊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문왕은 여상을 통해 공을 세워 마침내 천하의 왕이 되었습니다. 만약 문왕이 여상을 멀리하여 더불어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주에게 천자의 덕은 없었을 것이며, 문왕과 무왕도 그 왕업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今臣羈旅之臣也, 交疏於王, 而所願陳者皆匡君之事, 処人骨肉之閒, 願效愚忠而未知王之心也. 此所以王三問而不敢対者也. 臣非有畏而不敢言也.
금신기여지신야 교소어왕 이소원진자개광군지사 처인골육지간 원효우환이미지왕지심야. 차소이왕삼문이불감대자야. 신지유외이불감언야.
지금 신은 여기에 살고 있는 외국인으로 왕과는 어떤 교분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 왕의 일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자 골육 사이의 일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으로, 어리석은 충정을 다하고자 하나 왕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이것이 왕께서 세 번 물으셨으나 감히 대답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신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臣知今日言之於前而明日伏誅於後, 然臣不敢避也. 大王信行臣之言, 死不足以為臣患, 亡不足以為臣憂, 漆身為厲被髪為狂不足以為臣恥.
신지금일언지어전이명일복주어후 연신불감피야. 대왕신행신지언 사부족이위신환 망부족이위신우 칠신위여피발위광부족이위신치.
신은 오늘 앞에서 말하고 내일 뒤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신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대왕께서 신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신다면 죽는다 해도 신은 걱정하지 않을 것이며, 쫓겨난다 해도 신은 근심하지 않을 것이고, 몸에 옻칠을 하고 행려병자가 되거나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치광이가 되더라도 신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且以五帝之聖焉而死, 三王之仁焉而死, 五伯之賢焉而死, 烏獲、任鄙之力焉而死, 成荊、孟賁、王慶忌、夏育之勇焉而死. 死者, 人之所必不免也. 処必然之勢, 可以少有補於秦, 此臣之所大願也, 臣又何患哉!
차이오제지성언이사 삼왕지인언이사 오백지현언이사 오획 임비지력언이사 성형 맹분 왕경기 하육지용언이사. 사자 인지소필불면애. 처필연지세 가이소유포어진 차신지소대원야 신우하환재!
그리고 성인 같은 오제(五帝)도 죽었고, 어진 삼왕(三王)도 죽었으며, 현명했던 오패(五覇)도 죽었습니다. 오획(烏獲)이나 임비(任鄙)와 같은 장사도 죽었고, 성형(成荊), 맹분(孟賁), 왕경기(王慶忌), 하육(夏育) 같이 용맹한 자들도 죽었습니다. 죽음은 사람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필연적인 기세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진나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신이 가장 바라는 것이거늘 신이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伍子胥橐載而出昭関, 夜行晝伏, 至於陵水, 無以餬其口, 膝行蒲伏, 稽首肉袒, 鼓腹吹篪, 乞食於呉市, 卒興呉國, 闔閭為伯. 使臣得盡謀如伍子胥, 加之以幽囚, 終身不複見, 是臣之説行也, 臣又何憂?
오자서탁재이출소관 야행주복 지어릉수 무이호기구 슬행포복 계수육단 고복취지 걸식어오시 졸흥오국 합려위백. 사신득진모여오자서 가지이유수 종신불복견 시신지세행야 신우하우?
오자서(伍子胥)는 자루에 숨어 소관(昭關)을 빠져나와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숨으면서 능수(陵水)에 이르렀으나 먹을 것이 없어 무릎으로 기고 웃통을 벗고 머리를 조아렸으며 배를 두드리고 피리를 불며 오나라 저잣거리에서 구걸했으나 끝내는 오나라를 일으키고 합려를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신으로 하여금 오자서처럼 모략을 다 짜낼 수 있게 해주신다면 옥에 갇혀 평생 다시는 뵈옵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의 말씀이 실행될 터이니 신이 또 무엇을 걱정하오리까?
箕子、接輿漆身為厲, 被髪為狂, 無益於主. 仮使臣得同行於箕子, 可以有補於所賢之主, 是臣之大栄也, 臣有何恥? 臣之所恐者, 獨恐臣死之後, 天下見臣之盡忠而身死, 因以是杜口裹足, 莫肯郷秦耳.
기자 접여칠신위여 피발위광 무익어주, 가사신득동행어기자 가이유포어소현지주 시신지대영야 신유하치? 신지소공자 독공신사지후 천하견신지진충이신사 인이시두구과족 막긍향진이.
기자(箕子)와 접여(接輿)는 몸에 옻칠을 하고 행려병자 행세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치광이로 꾸몄지만 군주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만약 신이 기자처럼 행동하여 현명하신 군주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이는 신의 큰 영광이니 신이 무엇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신이 두려워하는, 오로지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신이 죽은 뒤 천하가 신이 충성을 다하고도 죽은 것을 보고 입은 다물고 발은 묶어 진으로 오려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일 뿐입니다.
足下上畏太後之厳, 下惑於姦臣之態, 居深宮之中, 不離阿保之手, 終身迷惑, 無與昭姦. 大者宗廟滅覆, 小者身以孤危, 此臣之所恐耳. 若夫窮辱之事, 死亡之患, 臣不敢畏也. 臣死而秦治, 是臣死賢於生.」
족하상외대후지엄 하혹어간신지능 거심궁지중 불리아보지수 종신미혹 무여소간. 재자종멸복 소자신이고위 차신지소공이. 약부궁욕지사 사망지환 신불감외야. 신사이진치 시신사현어생’
왕께서 위로는 태후의 위엄을 겁내고 아래로는 간신들의 자태에 혹하시고, 깊은 궁궐에 기거하시면서 시종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해 평생토록 미혹되어 간신을 가려내지 못하신다면 크게는 종묘가 없어지고 작게는 몸이 외롭고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궁하고 치욕스러운 일, 죽음의 두려움, 신은 겁내지 않습니다. 신이 죽어 진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이는 신의 죽음이 삶보다 나은 것입니다.”
진왕기왈 ‘선생시하언야! 부진국피원 과인우불초 선생내행욕지어차 시천이과인흔선생이존선왕지종묘야. 과인득수명어선생 시천소이행선생 이불기기고야. 선생내하이언약시! 사무소대 상급태후 하지대신 원선생실이교과인 무의관인야.
진왕이 무릎을 꿇은 채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진나라는 궁벽한 곳에 떨어져 있고, 과인은 어리석고 불초합니다. 선생께서 치욕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것은 하늘이 과인에게 선생 덕분에 선왕의 종묘를 보존케 하신 것입니다. 과인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이는 하늘이 선왕을 어여삐 여기시어 그 고아를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일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위로는 태후, 아래로는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선생께서 무엇이든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시길 바라니 과인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範睢拝, 秦王亦拝.
범수배 진왕역배.
범수가 절하자 진왕도 절했다.
範睢曰:「大王之國, 四塞以為固, 北有甘泉、谷口, 南帯涇、渭, 右隴、蜀, 左関、阪, 奮撃百萬, 戦車千乗, 利則出攻, 不利則入守, 此王者之地也. 民怯於私鬥而勇於公戦, 此王者之民也. 王並此二者而有之. 夫以秦卒之勇, 車騎之衆, 以治諸侯, 譬若施韓盧而搏蹇免也, 霸王之業可致也, 而群臣莫當其位. 至今閉関十五年, 不敢窺兵於山東者, 是穣侯為秦謀不忠, 而大王之計有所失也.」
범수왈 ‘대왕지국 사색이위고 북유감천 곡구 남대경 위 우롱 촉 죄관 판 구격백만 전거천승 이즉출공 불리즉입수 차왕자지지야. 민겁어사투이용어공전 차왕자지민야. 왕병차이자이유지. 부이진졸지용 거기지중 이치제후 비약시한로이반건면야 패왕지업가치야 이군신막당기위. 지금폐관십오년 불감규병어산동자 시양후위진모불충 이대왕지계소실야’
범수가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요새로 견고합니다. 북으로는 감천(甘泉)과 곡구(谷口)가, 남쪽에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서쪽으로는 농산(隴山)과 촉산(蜀山)이,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판(阪)이 있습니다. 용맹한 용사가 백만 에, 전차가 1천승입니다. 백성들은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먹지만 나라의 전쟁에는 용감합니다. 이것이 왕의 백성입니다. 왕께서는 이 둘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대저 진나라가 용맹한 병사에 많은 전차와 기마로 제후들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한로(韓盧)가 절뚝거리는 토끼를 잡는 것과 같아 패왕(覇王)의 업은 충분히 가능합니다만 신하들이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함곡관을 닫은 지 15년, 군대를 일으켜 감히 산동을 엿보지 못하는 것은 양후가 진나라를 위해 충정으로 계책을 내지 않는 것과 대왕의 계책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秦王跽曰:「寡人願聞失計.」
진왕기왈 ‘과인원문실계’
진왕이 무릎을 꿇으며 ‘과인의 잘못된 계책에 대해 들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然左右多竊聴者, 範睢恐, 未敢言內, 先言外事, 以観秦王之俯仰. 因進曰:
연좌우다규청자 범수공 미감언내 선언외사 이관진왕지부앙. 인진왈:
그러나 좌우에 몰래 엿듣는 자가 많아 범수는 두려워 감히 내부 일은 말하지 않고 바깥일을 먼저 말하면서 진왕의 태도를 살폈다. 그리고는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夫穣侯越韓、魏而攻斉綱壽, 非計也. 少出師則不足以傷斉, 多出師則害於秦. 臣意王之計, 欲少出師而悉韓、魏之兵也, 則不義矣. 今見與國之不親也, 越人之國而攻, 可乎? 其於計疏矣.
‘부양후월한 위이공제강수 비계야. 소년사즉부족이상제 다풀사즉해어진. 신의왕지계 욕소출사이실한 위지병야 즉불의의. 금견여국지불친야 월인지국이공 가호? 시어계소의.
‘양후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넘어 제나라의 강읍(綱邑)과 수읍(壽邑)을 공격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군대를 적게 내면 제에게 해를 입히기에 부족하고, 군대를 많이 내면 진나라에게 해가 됩니다. 신이 왕의 계책을 헤아려 보건대, 군대를 적게 내고 한, 위나라의 병사들을 전부 동원하려고 하시는 모양인데 이는 의롭지 못합니다. 지금 볼 때 우리와 친한 나라와 친하게 지내지 않고 그들 나라를 넘어 공격하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계책이랄 것도 없습니다.
且昔斉湣王南攻楚, 破軍殺將, 再辟地千里, 而斉尺寸之地無得焉者, 豈不欲得地哉, 形勢不能有也. 諸侯見斉之罷獘, 君臣之不和也, 興兵而伐斉, 大破之. 士辱兵頓, 皆咎其王, 曰:『誰為此計者乎?』王曰:『文子為之.』大臣作亂, 文子出走.
차석제민왕남공초 파군살장 재벽지천리 이제척촌지지무득언자 기불욕득지재 형세불능유야. 제후견제지파폐 군신지불화야 흥병이벌제 대파지. 사욕병돈 개구기왕 왈 “수위차계자오” 왕왈 “문자위지” 대신작란 문자출주.
또 옛날 제 민왕(湣王)은 남쪽 초를 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초나라의 장수를 죽여서 사방 1천여 리의 땅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제나라는 한 평의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어찌 땅을 차지하고 싶지 않아서였겠습니까? 형세가 급박해 땅을 점령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후들은 제나라가 지쳐 있고 군주와 신하가 단합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바로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제나라는 대패하여 장수는 욕을 당하고 병사들은 꺾였습니다. 제나라는 모두 국왕을 비난했습니다. 누군가 왕에게 “이 계획은 누가 세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왕이 “문자(文子)가 세운 계획이오.”라고 하자 신하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문자를 내쫓았습니다.
攻斉所以大破者, 以其伐楚而肥韓、魏也. 此所謂借賊兵而齎盜糧者也. 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則王之寸也, 得尺亦王之尺也. 今釈此而遠攻, 不亦繆乎!
공제소이대파자 이기벌초이비한 위야. 차소위사적병이게도향자야. 왕불여원교이근공 득촌즉왕지촌야 득척역왕지척야. 금석차이원공 불역루호!
제나라가 크게 패한 까닭은 제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는 틈에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적에게 병기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식량을 보태준 것입니다. 왕께서는 멀리 떨어진 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시느니만 못합니다. 이래야만 한 치의 땅을 얻더라도 왕의 한 치의 땅이 되고, 한 자의 땅을 얻더라도 왕의 한 자의 땅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가까운 나라는 내버려 두고 멀리 원정하려고 하시니 이 얼마나 큰 잘못이겠습니까?
且昔者中山之國地方五百里, 趙獨呑之, 功成名立而利附焉, 天下莫之能害也. 今夫韓、魏, 中國之処而天下之樞也, 王其欲霸, 必親中國以為天下樞, 以威楚、趙. 楚彊則附趙, 趙彊則附楚, 楚、趙皆附, 斉必懼矣. 斉懼, 必卑辭重幣以事秦. 斉附而韓、魏因可虜也.」
차석자중산지국지방오백리 조독탄지 공성명립이이부언 천하막지능해야. 금부한 위 중국처이천하지구야 왕기욕패 필친중국이위천하구 이위초 조. 초강즉부조 조강즉부초 초 조개부 제필구의. 제구 필비사중폐이사진. 제부이한 위인가노야’
옛날 중산(中山)의 땅이 사방 500리였는데 중산과 가장 가까운 조나라가 혼자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명분은 명분대로 얻고 이익은 조나라로 돌아갔지만 천하 어느 나라도 이를 막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가 중원에 위치하여 천하 중추 지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패왕이 되시려면 중원 지역 국가를 가까이하여 천하의 중추를 장악한 다음 초나라와 제나라를 제압해야 합니다. 초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를 내 편으로, 조나라가 강해지면 초나라를 내 편으로 만드십시오. 초나라와 조나라가 모두 내 편이 되면 제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에게 겁을 먹을 것입니다. 제나라가 겁을 먹으면 분명 말을 공손히 하고, 많은 재물로 진나라를 섬기게 됩니다. 또 제나라가 내 편이 되면 한나라와 위나라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昭王曰:「吾欲親魏久矣, 而魏多変之國也, 寡人不能親. 請問親魏柰何?」対曰:「王卑詞重幣以事之;不可, 則割地而賂之;不可, 因挙兵而伐之.」王曰:「寡人敬聞命矣.」乃拝範睢為客卿, 謀兵事. 卒聴範睢謀, 使五大夫綰伐魏, 抜懐. 後二歳, 抜邢丘.
소왕왈 ‘오욕친위구의 이위가변지국야 과인불능친 청문친위내하?’ 대왈 ‘왕비사중혜이사지; 불가 즉할지이뢰지; 불가 인거병이벌지’ 왕왈 ‘과인경문명의’ 내배범수위객경 모병사. 졸청범수모 사오대부관벌위 발양. 후이세 발형구.
진 소왕이 ‘과인이 오래전부터 위나라와 친하려 했으나 위나라에 변화가 많아 친하지 못했는데 위나라와 가까이 지내려면 어찌하면 되겠소?’라고 물었다. 범수는 ‘왕께서는 겸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 그를 섬기시되 안 되면 땅이라도 떼어 뇌물로 주십시오. 그렇게 해도 안 될 때 군대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시는 것입니다.’라 했다. 진왕은 ‘선생의 가르침 잘 들었습니다.’라 하고는 바로 범수를 객경(客卿)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상의했다. 마침내 범수의 계책을 받아들여 오대부(五大夫) 관(綰)을 보내 위나라를 공격하여 회읍(懷邑)을 함락시켰다. 2년 후, 형구(邢丘)를 함락시켰다.
客卿範睢複説昭王曰:「秦韓之地形, 相錯如繍. 秦之有韓也, 譬如木之有蠹也, 人之有心腹之病也. 天下無変則已, 天下有変, 其為秦患者孰大於韓乎? 王不如収韓.」昭王曰:「吾固欲収韓, 韓不聴, 為之柰何?」対曰:
객경범수복세소왕왈 ‘진한지지형 상착여수. 진지유한야 비여목지유두야 인지유심복지병야. 천하무변즉이 천하유변 기위진환자숙대어한호? 왕불여수한’ 소왕왈 ‘오고욕수한 한불청 위지내하?’ 대왈:
객경 범수가 진 소왕에게 ‘진나라와 한나라가 국경을 맞댄 지역은 마치 수를 놓은 듯 복잡합니다. 진나라에 들어와 있는 한나라의 땅은 나무에 좀벌레가 붙은 듯, 사람의 내장에 병이 난 듯합니다. 천하에 변고가 없으면 괜찮습니다만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진나라의 적으로 한나라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한나라를 편으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했다. 소왕이 “과인이 당초 한나라를 우리 편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한나라가 듣지를 않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다. 범수는 이렇게 말했다.
「韓安得無聴乎? 王下兵而攻滎陽, 則鞏、成皐之道不通;北斷太行之道, 則上黨之師不下. 王一興兵而攻滎陽, 則其國斷而為三. 夫韓見必亡, 安得不聴乎? 若韓聴, 而霸事因可慮矣.」
‘한안득무청호? 왕하병이공형양 즉공 성고지도불통; 북단태행지도 즉상당지사불하. 왕일흥이공형양 즉기국단이위삼. 부한견필망 안득불청호? 약한청 이패사인가여의’
‘한나라가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께서 군을 동쪽으로 보내 형양(滎陽)을 공격하면 공읍(鞏邑)과 성고(成皐)의 도로는 바로 통하지 못합니다. 북으로는 태항산(太行山)의 험한 길을 막으면 상당(上黨)의 군대는 남으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왕께서 일단 군을 일으켜 형양을 공격하시면 한나라는 셋으로 쪼개지고 한나라가 망할 것이 뻔한데 한나라가 어찌 듣지 않겠습니까? 한나라가 이를 따른다면 왕께서는 패왕의 업을 이루기 위한 계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王曰:「善.」且欲発使於韓.
왕왈 ‘선’ 차욕발사어한.
소왕은 ‘그렇군요’ 하고는 바로 한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範睢日益親, 複説用數年矣, 因請閒説曰:「臣居山東時, 聞斉之有田文, 不聞其有王也;聞秦之有太後、穣侯、華陽、高陵、涇陽, 不聞其有王也. 夫擅國之謂王, 能利害之謂王, 制殺生之威之謂王.
범수일익친 복세용수년의 인청간세왈 ‘신거산동시 문제지유전문 불문기유왕야; 문진지유채후 양후 화양 고릉 경앵 불문기유왕애. 부천국지위왕 능이해지위왕 제살생지위지위왕.
범수는 날이 갈수록 진왕과 가까워져 소왕에게 진언하면서 지낸 지 몇 년이 지났다. 범수는 마침내 기회를 보아 진왕에게 ‘신이 산동에 있을 때 제나라에는 오로지 전문(田文)이 있을 뿐 제왕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진나라에는 태후(太后), 양후(穰侯), 화양군(華陽君), 고릉군(高陵君), 경양군(涇陽君)이 있을 뿐이지 왕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저 국정을 오로지 할 수 있는 사람을 왕이라 부르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과 손해를 끼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왕이라 하며,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위세를 가진 사람을 왕이라 합니다.
今太後擅行不顧, 穣侯出使不報, 華陽、涇陽等撃斷無諱, 高陵進退不請. 四貴備而國不危者, 未之有也. 為此四貴者下, 乃所謂無王也. 然則権安得不傾, 令安得従王出乎? 臣聞善治國者, 乃內固其威而外重其権.
금태후천행불고 양후출사불보 화양 경양등격잔무위 고릉진퇴불청. 사귀비이국불위자 미지유야. 위차사귀자하 내소위무왕야. 연즉권안득불경 영안득종왕출호? 신문선치국자 내내고기위이외중기권.
그런데 지금 태후께서는 왕은 아랑곳 않고 멋대로 행동하고, 양후는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도 왕께 아뢰지 않으며, 화양군과 경양군도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벌을 주고 죽이는 행동을 마구 저지르고 있습니다. 고릉군은 정책을 바꾸고 관리를 기용하는 문제 등을 왕께 아뢰지 않고 멋대로 합니다. 이런 네 부류의 귀하신 몸들이 계시니 나라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왕께서 이 네 사람 아랫자리에 계시게 되면 실제로 왕이 아닌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왕의 권력은 기울 수밖에 없고, 명령이 왕에게서 나가지 못합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군주라면 안으로는 위신을 단단히 다지고, 밖으로는 권력을 무겁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穣侯使者操王之重, 決制於諸侯, 剖符於天下, 政適伐國, 莫敢不聴. 戦勝攻取則利帰於陶, 國獘禦於諸侯;戦敗則結怨於百姓, 而禍帰於社稷.
양후사자조왕지중 결제어제후 부부어천하 정적벌국 막감불청. 전승공취즉이귀어도 국폐어어제후: 전패즉결원어백성 이화귀어사직.
양후는 왕의 권한을 가로채서 마음대로 사신을 보내 제후들을 다루고, 천하의 땅을 나누어 사람을 봉하고, 적을 무찌르고 다른 나라를 치는 등, 진나라의 국사를 독단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그 이익을 자신의 봉읍 도(陶)로 가져와 제후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패하면 백성을 원망하고 그 화를 조상 탓이라 합니다.
詩曰『木実繁者披其枝, 披其枝者傷其心;大其都者危其國, 尊其臣者卑其主』. 崔杼、淖歯管斉, 射王股, 擢王筋, 県之於廟梁, 宿昔而死. 李兌管趙, 囚主父於沙丘, 百日而餓死.
시왈 “목실번자피기지 피기지자상기심; 대기도자위기국 존기신자비기주” 최저 요치관제 사왕고 탁왕근 현지어조량 숙석이사. 이태관조 인주부어사구 백일이아사.
옛 시(詩)에 “열매가 너무 많으면 나뭇가지를 상하게 하고, 가지가 상하게 되면 나무의 정기를 해친다. 수도가 너무 크면 나라가 위태롭고 신하가 높이면 임금은 낮아진다.’라고 했습니다. 최저(崔杼)와 요치(淖歯)가 제나라를 손에 넣자 최저는 제 장공(莊公)의 다리를 화살로 쏘아 죽였고, 요치는 제 민왕(湣王)의 힘줄을 뽑아내서 하룻밤 사이 묘당의 대들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이태(李兌)가 조나라를 장악하자 주보(主父)를 사구(沙丘)에 가두어서 백일 동안 굶겨 죽였습니다.
今臣聞秦太後、穣侯用事, 高陵、華陽、涇陽佐之, 卒無秦王, 此亦淖歯、李兌之類也. 且夫三代所以亡國者, 君専授政, 縦酒馳騁弋猟, 不聴政事. 其所授者, 妒賢嫉能, 禦下蔽上, 以成其私, 不為主計, 而主不覚悟, 故失其國.
금신문진태후 양후용사 고릉 화양 경양좌지 졸무진왕 차역요치 이태지류야. 차부삼대소이망국자 군존수정 종주치빙익렵 불청정사. 기소수자 투현질능 어하폐상 이성기사 불위주계 이주불각오 고실기국.
지금 진나라에는 태후와 양후가 권력을 잡고 있고,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이 그들을 돕고 있으니 끝내는 진왕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들이 요치나 이태와 같은 패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 상, 주 삼대의 왕조가 차례로 망한 까닭은 군주가 나라의 큰 권력을 믿는 신하들에게 주고 술과 사냥에 빠져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군주들이 믿었던 자들은 모두 덕 있고 유능한 사람들을 시기하여 아래를 누르고 위를 가로막아 사사로움만 꾀한 바, 군주를 위해서는 충성하지 않아도 군주가 그것을 몰랐기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今自有秩以上至諸大吏, 下及王左右, 無非相國之人者. 見王獨立於朝, 臣竊為王恐, 萬世之後, 有秦國者非王子孫也.」
금자유질이상지제대리 하급왕좌우 무비상국지인자. 견왕독립어조 신규위왕공 만세지후 유긴국자비왕자손야’
지금 진나라에는 지방관을 비롯하여 많은 조정 대신들로부터 심지어 왕 좌우의 시종에 이르기까지 재상 양후의 측근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소인이 보기에 왕께서는 지금 조정에서 완전히 고립되셨습니다. 소인은 만세 뒤 진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왕의 자손이 아닌 자가 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昭王聞之大懼, 曰:「善.」於是廃太後, 逐穣侯、高陵、華陽、涇陽君於関外. 秦王乃拝範睢為相. 収穣侯之印, 使帰陶, 因使県官給車牛以徙, 千乗有餘. 到関, 関閲其寶器, 寶器珍怪多於王室.
소왕문지대구 왈 ‘선’ 어시폐태후 축양후 고릉 화양 경양군어관외. 진왕내배범수위상. 수양후지인 사귀도 인사현관급거우이사 천승유여 도관 관열기보기 보기진괴다어왕실.
소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알겠소.’라고 했다. 이에 태후를 폐출시키고, 양후,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을 함곡관 밖으로 내쳤다. 진왕은 범수를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고, 양후의 재상 도장을 거두어들여 그를 도읍(陶邑)으로 돌려보냈다. 현의 관리에게 짐을 실어갈 수레와 소를 양후에게 제공하게 했는데 수레가 1천 대를 넘었다. 함곡관에 도착해 관리가 그의 귀중품들을 조사해보니 진귀한 물건들이 왕실보다 더 많았다.
秦封範睢以應, 號為應侯. 當是時, 秦昭王四十一年也.
진봉범수이응 호위응후. 당시시 진소왕사십일년야.
진 소왕이 범수를 응읍(應邑)의 땅에 봉하여 응후(應侯)라고 불렀다. 이때가 진 소왕이 재위한 지 41년째였다.
範睢既相秦, 秦號曰張祿, 而魏不知, 以為範睢已死久矣. 魏聞秦且東伐韓、魏, 魏使須賈於秦. 範睢聞之, 為微行, 敝衣閒歩之邸, 見須賈.
범수기상진 진호왕장록 이위부지 이위범수이사구의. 윈문진차동벌한 위사수고어진 범수문지 위미행 폐의간보지저 견수고.
범수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지만 진나라에서는 그를 장록(張祿)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에서는 이를 모르고 범수가 죽은 지 오래라고 여겼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동쪽으로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수고(須賈)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범수는 이를 듣고 신분을 감추고 다 해진 옷으로 변장하고는 사람이 뜸한 길을 통해 객관으로 수고를 찾아갔다.
須賈見之而驚曰:「範叔固無恙乎!」範睢曰:「然.」須賈笑曰:「範叔有説於秦邪?」曰:「不也. 睢前日得過於魏相, 故亡逃至此, 安敢説乎!」須賈曰:「今叔何事?」範睢曰:「臣為人庸賃.」須賈意哀之, 留與坐飲食, 曰:「範叔一寒如此哉!」乃取其一綈袍以賜之.
수고션지이경왈 ‘범숙고무양호!’범수왈 ‘연’ 수고소왈; ‘범숙유세어진야?’ 왈 ‘불야 수전일득과어위상 고망도지차 안감세호’ 수고왈 ‘금숙하사?’ 범수왈 ‘신위인용임’ 수고의애지 유여좌음식 왈 ‘범숙일한여차재!’ 내취기일제포이사지.
수고가 그를 보고는 놀라서 ‘범숙(范叔)께서는 그동안 무사했는가?’라고 물었다. 범수는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수고가 웃으면서 ‘범숙은 진나라에 와서 유세하고 있는가?’라고 했다. 범수는 ‘아닙니다. 신이 전에 위나라 재상의 미움을 받아 이곳으로 도망을 왔는데 어찌 감히 유세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수고가 ‘지금 범숙께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하자 범수는 ‘남의 고용살이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수고가 속으로 범수를 가엾게 여겨 자리에 앉힌 다음 술과 밥을 주면서 ‘범숙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었단 말인가’라면서 두터운 솜옷을 한 벌을 주었다.
須賈因問曰:「秦相張君, 公知之乎? 吾聞幸於王, 天下之事皆決於相君. 今吾事之去留在張君. 孺子豈有客習於相君者哉?」範睢曰:「主人翁習知之. 唯睢亦得謁, 睢請為見君於張君.」須賈曰:「吾馬病, 車軸折, 非大車駟馬, 吾固不出.」範睢曰:「願為君借大車駟馬於主人翁.」
수고인문왈 ‘진상장군 공지지호? 오문행어왕 천하지사개결어상군. 금오사지거류재장군. 유자기유객습어상군자재?’ 범수왈 ‘주인옹습지지. 유수역득알 수청위견군어장군’ 수고왈 ‘오마병 거축절 비개거사마 오고불출’ 범수왈 ‘원위군차대거사마어주인옹’
그러면서 수고는 ‘진나라의 재상 장 선생을 아는가? 내가 듣기에 진왕의 총애를 받아 천하의 모든 일이 재상의 의견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던데, 지금 내 일의 성공 여부도 모두 재상 장 선생에게 달려있다네. 혹 재상과 가까운 사람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범수가 ‘제 주인이 그분을 잘 알고 있고 저 또한 재상을 한 번 뵌 적이 있으니 주인에게 부탁하여 재상을 만날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수고는 ‘내 말이 병이 들었고 수레 축도 부러지는 통에 네 필 말이 끄는 큰 수레가 없어 대문을 나갈 수가 없다네.’라고 했다. 범수는 ‘신이 주인에게서 네 필 말이 끄는 수레를 빌려오겠습니다.’라고 했다.
範睢帰取大車駟馬, 為須賈禦之, 入秦相府. 府中望見, 有識者皆避匿. 須賈怪之. 至相舎門, 謂須賈曰:「待我, 我為君先入通於相君.」須賈待門下, 持車良久, 問門下曰:「範叔不出, 何也?」門下曰:「無範叔.」須賈曰:「郷者與我載而入者.」門下曰:「乃吾相張君也.」
범수귀취대거사마 위수고어지 입진상부. 부중망견 유식가개피익 수고괴지. 지상사문 위수고왈 ‘대아 아위군선입통어성군’ 수고대문하 지거양구 문하하왈 ‘범숙불출 하야?’ 문하왈 ‘무범숙’ 수고왈 ‘향자여아재이입자’ 문하왈 ‘내오상장군야’
범수가 돌아갔다가 네 필 말이 끄는 수레를 끌고 와서는 몸소 수고를 태워 수레를 몰고 진나라의 재상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에 있던 사람들 중 범수를 알아 본 자들은 모두 피해 숨었다. 수고가 이상하게 여겼다. 재상 관저 입구에 도착하자 범수는 수고에게 ‘잠깐 기다리십시오. 신이 먼저 들어가서 재상에 알릴테니.’라고 했다. 수고가 입구에게 한참을 기다리다가 문지기에게 ‘범숙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데 무슨 까닭인가?’라고 물었다. 문지기가 ‘여기에 범숙이란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하자 수고가 ‘방금 나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와서 안으로 들어간 그 사람인데’라고 하자 문지기는 ‘그 분은 우리 재상이신 장 선생입니다’라고 했다.
須賈大驚, 自知見売, 乃肉袒膝行, 因門下人謝罪. 於是範睢盛帷帳, 待者甚衆, 見之. 須賈頓首言死罪, 曰:「賈不意君能自致於青雲之上, 賈不敢複読天下之書, 不敢複與天下之事. 賈有湯鑊之罪, 請自屏於胡貉之地, 唯君死生之!」
수고대경 자지각매 내육단슬행 인문하인사죄. 오시범수성휘장 대자심중 견지. 수고돈수언사죄 왈 ‘고불의군능자치어청운지사 소불감복독천하지서 불감복여천하지사. 고유탕확지죄 청자병어호학지지 유군사생지!’
수고는 크게 놀라며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곧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나아가 문지기를 통해서 죄를 청했다. 이때 범수는 화려한 장막 안에 앉아서 많은 시종들을 거느린 채 수고를 맞이했다. 수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신은 군께서 이렇게 출세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수고가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다시는 천하의 책을 읽을 생각도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며, 천하의 정치에 참여할 생각도 감히 품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삶겨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빌고 알아서 무지렁이 땅으로 물러가고자 합니다. 그저 공의 너그러우신 처분만을 바라올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範睢曰:「汝罪有幾?」曰:「擢賈之髪以続賈之罪, 尚未足.」
범수왈 ‘여죄유기?’ 왈 ‘탁고지발이속고지죄 상미족’
범수가 ‘네 죄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수고는 ‘신의 모든 털을 다 뽑아 헤아려도 모자랄 만큼 많습니다.’라고 했다.
範睢曰:「汝罪有三耳. 昔者楚昭王時而申包胥為楚卻呉軍, 楚王封之以荊五千戸, 包胥辭不受, 為丘墓之寄於荊也. 今睢之先人丘墓亦在魏, 公前以睢為有外心於斉而悪睢於魏斉, 公之罪一也. 當魏斉辱我於廁中, 公不止, 罪二也. 更酔而溺我, 公其何忍乎? 罪三矣. 然公之所以得無死者, 以綈袍戀戀, 有故人之意, 故釈公.」
범수왈 ‘여죄유삼이. 석자초소왕시이신포서위초각오군 초왕봉지이형오천호 포서사불수 위구묘지기어형야. 금수지선인구묘역재위 공전이수위유외심어제이오수어위제 공지죄일야. 당위제욕아어측중 공불지 죄이야. 경취이뇨아 공기하인호?
범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죄는 세 가지이다. 옛날 초 소왕(昭王) 때 신포서(申包胥)가 초나라를 위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물리치자 초왕은 형(荊)나라의 땅 5천 호를 그에게 내렸다. 신포서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는데, 그의 조상이 형나라 땅에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 조상의 무덤이 위에 있기에 위나라를 배반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네가 전에 내가 제나라와 내통하여 위나라를 팔아넘기려 한다고 여겨서는 위제(魏齊) 앞에서 나를 모함했으니 이것이 너의 첫 번째 죄목이다. 위제가 나를 욕보이고 변소 안에다 버릴 때 네가 말리지 않은 것, 이것이 두 번째 죄이다. 또 위제의 빈객들이 술에 취해 돌아가며 내 몸에다 오줌을 갈겼는데도 너는 모르는 척했으니 이것이 너의 세 번째 죄이다. 그러나 오늘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두툼한 솜옷을 주며 옛정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를 놓아주는 것이다.’
乃謝罷. 入言之昭王, 罷帰須賈.
내사파 입언지소왕 파귀수고.
이렇게 접견을 마쳤다. 범수는 궁궐에 들어가 이 일을 소왕에게 보고하고 수고를 돌려보냈다.
須賈辭於範睢, 範睢大供具, 盡請諸侯使, 與坐堂上, 食飲甚設. 而坐須賈於堂下, 置莝豆其前, 令両黥徒夾而馬食之. 數曰:「為我告魏王, 急持魏斉頭來! 不然者, 我且屠大梁.」須賈帰, 以告魏斉. 魏斉恐, 亡走趙. 匿平原君所.
수고사어범수 범수대공구 진청제후사 여좌당상 식음심설. 이좌수고어당하 치좌두기전 영양경도협이마식지. 수왈 ‘위아고위왕 금지위제두래! 불연자 아차도대량’ 수고귀 이고위제. 위제공 망도조. 익평원군소.
수고가 범수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범수는 잔치를 크게 벌여 여러 나라 사신들을 모두 초대했다. 초청된 사신들은 함께 웅장한 대청에서 풍성한 술과 안주를 즐겼다. 범수는 수고를 대청 아래에 앉게 해서는 말과 소가 먹는 여물을 구유에 담아 그 앞에 내놓고는 얼굴에 먹줄로 뜸을 들이는 형벌인 경형(黥刑)을 받은 두 죄인에게 양옆에서 먹이를 먹이듯 수고에게 먹이게 하면서 ‘위왕에게 전하라! 즉각 위제의 머리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대량성(大梁城)을 허물고 대량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라고 했다. 수고가 돌아가서 이 일들을 위제에게 말하자 위제는 겁을 먹고 조나라로 달아나 평원군(平原君) 집에 숨었다.
範睢既相, 王稽謂範睢曰:「事有不可知者三, 有不柰何者亦三. 宮車一日晏駕, 是事之不可知者一也. 君卒然捐館舎, 是事之不可知者二也. 使臣卒然填溝壑, 是事之不可知者三也. 宮車一日晏駕, 君雖恨於臣, 無可柰何. 君卒然捐館舎, 君雖恨於臣, 亦無可柰何. 使臣卒然填溝壑, 君雖恨於臣, 亦無可柰何.」
범수기상 왕계위범수왈 ‘사유불가지자삼 유불내하자역삼. 궁거일일안가 시사지불가지자일야. 군졸연연관사 시사지불가지자이야. 사신졸연전구학 시사지불가지자삼야. 궁거일일안가 군수한어신 무가내하. 군졸연연관사 군수한어신 역무가내하. 사신졸연전구학 군수산어신 역무가내하.
범수가 재상이 된 뒤 어느 날 왕계(王稽)는 범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예측하지 못할 일 세 가지와 또 어찌해 볼 수 없는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왕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첫 번째 일이고, 재상께서 갑자기 관저를 버리고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것이 두 번째 예측할 수 없는 일이며, 제가 언제 객사할지 모르는 것이 세 번째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왕께서 어느 날 돌아가시면 군께서 진작 저를 왕께 추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해봐야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재상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진작저를 기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객사해 재상께서 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을 후회해야 이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範睢不懌, 乃入言於王曰:「非王稽之忠, 莫能內臣於函谷関;非大王之賢聖, 莫能貴臣. 今臣官至於相, 爵在列侯, 王稽之官尚止於謁者, 非其內臣之意也.」
범수불역 내입언어왕왈 ‘비왕계지충 막능내신어함곡관; 비대왕지현성 막능귀신. 금신관지어상 작재열위 왕계지관상지어알자 비기내신지의야’
범수는 이 말이 불쾌했으나 조정에 나아가 소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왕계의 충심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저를 함곡관에서 데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왕의 현명하고 성스러운 덕이 아니었더라면 신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지금 신의 관직은 재상에 이르고 작위는 후의 반열에 들었는데 왕계의 관직은 아직 알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을 진에 데리고 온 왕계의 뜻은 아닐 줄 압니다.’
昭王召王稽, 拝為河東守, 三歳不上計. 又任鄭安平, 昭王以為將軍. 範睢於是散家財物, 盡以報所嘗困厄者. 一飯之徳必償, 睚眥之怨必報.
소왕소왕계 뱌위하동수 삼세불상계. 우임정안평 소왕이위장군. 범수어시산가재물 진이보소상곤액자. 일반지덕필상 애자지원필보.
소왕이 왕계를 불러서 그를 하동(河東) 군수(郡守)에 임명했다. 왕계는 부임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조정에 시정 보고를 하지 않았다. 범수가 또 정안평(鄭安平)을 추천하자 소왕은 그를 장군에 임명했다. 그 뒤 범수는 집의 재물을 나누어 가난할 때 신세진 진나라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보답했다. 단 한 끼의 식사에 대한 은혜도 반드시 보답했고, 한 번 째려본 원한도 반드시 보복했다.
範睢相秦二年, 秦昭王之四十二年, 東伐韓少曲、高平, 抜之.
범수상진이년 진소왕직사십이년 동벌한소곡 고평 발지.
범수가 진나라의 재상이 된 지 2년, 소왕이 재위한 지 42년째 되는 해, 동쪽으로 한의 소곡(少曲)과 고평(高平)을 공격해 점령했다.
秦昭王聞魏斉在平原君所, 欲為範睢必報其仇, 乃詳為好書遺平原君曰;「寡人聞君之高義, 願與君為布衣之友, 君幸過寡人, 寡人願與君為十日之飲.」
진소왕문위제재평원군소 욕이범수필보기구 내성위호서유평원군왈 ‘과인문군지고의 원여군위포의지우 군행고과인 과인원여군위십일지음’
진 소왕이 위제가 평원군의 집에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범수의 원수를 갚아주려고 ‘내가 오래전부터 그대의 높은 정의감에 대해 들었소. 원컨대 그대와 서로 대등하게 구속받지 않고 친구가 되고 싶으니 그대는 내게로 와서 열흘 동안 술자리를 함께 했으면 하오’라는 거짓 편지를 평원군에게 보냈다.
平原君畏秦, 且以為然, 而入秦見昭王. 昭王與平原君飲數日, 昭王謂平原君曰:「昔周文王得呂尚以為太公, 斉桓公得管夷吾以為仲父, 今範君亦寡人之叔父也. 範君之仇在君之家, 願使人帰取其頭來;不然, 吾不出君於関.」
평원군외진 차이위연 이입진견소왕. 소왕여평원군음수일 소왕위평원군왈 ‘석주문왕득여상이위태공 제환공득관이오이위중보 금범군역과인지숙부야. 범군지구재군지가 원사인귀취기두래; 불연 오불출구어관’
평원군은 진나라가 두려웠고, 또 편지의 말들이 정말인 줄 알고는 바로 진나라로 가서 소왕을 만났다. 소왕은 평원군과 며칠간 술자리를 함께 한 다음 ‘옛날 주 문왕은 여상을 얻어 그를 태공(太公)으로 받들었고, 제 환공은 관이오(管夷吾, 관중)를 얻어 그를 중보(仲父)로 삼았소. 나는 지금 범 선생을 숙부(叔父)처럼 여기고 있는데 범 선생의 원수가 그대 집에 숨어 있다 하니 그대가 사람을 시켜 그 목을 베어 오도록 하시오. 아니면 그대를 함곡관에서 못 나가게 할 것이오.’라고 했다.
平原君曰:「貴而為交者, 為賎也;富而為交者, 為貧也.67) 夫魏斉者, 勝之友也, 在, 固不出也, 今又不在臣所.」
평원군왈 ‘귀이위교자 위천야 ; 부이위교자 위빈야. 부위제자 승지우야 재 고불출야 금우부재신소’
이에 평원군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누군가와 사귀는 것은 천한 몸이 되었을 때 도움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위제는 저의 친구이고, 그가 내 집에 있다 해도 내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그는 제 집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昭王乃遺趙王書曰:「王之弟在秦, 範君之仇魏斉在平原君之家. 王使人疾持其頭來;不然, 吾挙兵而伐趙, 又不出王之弟於関.」
소왕내유조왕서왈 ‘왕지제재진 범군지구위제재평원군지가 왕사인질지기두래; 불련 오거병이벌조 우불출왕지제어관’
이에 소왕은 곧 조왕에게 ‘지금 왕의 동생이 진나라에 있고, 범 선생의 원수인 위제가 평원군의 집에 숨어 있소. 왕께서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위제를 목을 베어 보내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바로 군대를 내어 조나라를 치고, 왕의 동생을 함곡관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趙孝成王乃発卒囲平原君家, 急, 魏斉夜亡出, 見趙相虞卿. 虞卿度趙王終不可説, 乃解其相印, 與魏斉亡, 閒行, 念諸侯莫可以急抵者, 乃複走大梁, 欲因信陵君以走楚. 信陵君聞之, 畏秦, 猶予未肯見, 曰:「虞卿何如人也?」
조효성왕내발졸위평원군가 급 위제여망출 견조상우경, 우경도재조왕종불가세 내해기상인 여위제망 간행 념제후막가이급저자 냐복주대량 욕인신릉군이주초. 신릉군문지 외진 유여미긍견 왈 ‘우경하여인야?’
조 효성왕(孝成王)은 바로 병사를 보내 평원군의 집을 포위했다. 일이 급해지자 위제는 밤 사이 도망쳐서 조나라의 재상 우경(虞卿)에게 몸을 맡기길 청했다. 우경은 조왕이 진나라를 끝내 설득하지 못할 것으로 알고 재상 도장을 내버리고 위제와 함께 몰래 도망쳤다. 우경이 몸을 맡길 만한 제후를 떠올려 보았으나 느닷없이 찾아갈 만한 곳이 없어 바로 대량(大梁)으로 도망가서는 신릉군(信陵君)의 주선을 받아 초나라로 달아나려고 했다. 신릉군이 이 소식을 들었으나 진이 겁이 나서 머뭇거리면서 만나 주지 않고는 ‘우경이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時侯嬴在旁, 曰:
시후영재방 왈:
이때 후영(侯嬴)이 신릉군 곁에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人固未易知, 知人亦未易也. 夫虞卿躡屩簷簦, 一見趙王, 賜白璧一雙, 黃金百鎰;再見, 拝為上卿;三見, 卒受相印, 封萬戸侯. 當此之時, 天下爭知之. 夫魏斉窮困過虞卿, 虞卿不敢重爵祿之尊, 解相印, 捐萬戸侯而閒行. 急士之窮而帰公子, 公子曰『何如人』. 人固不易知, 知人亦未易也!」
‘인고미이지 지인역미이야. 부우경섭교첨등 일견조왕 사백벽일쌍 황금백일; 재현 배위상경; 삼경 졸수상인 봉만호후. 탕차지시 천하쟁지지. 부위제궁곤과우경 우경불감중작록지존 해상인 손만호후이한행. 금사지궁이귀공자 공자왈 “하여인” 인고불이지 지인역미이야’
‘사람이 본디 자신을 알기도 힘들지만 남을 아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경은 짚신을 신고 자루 같은 긴 모자를 쓴 남루한 행색으로 조왕을 만났습니다. 조왕은 그를 처음 보고도 그에게 백옥 한 쌍과 황금 100일을 내렸고, 두 번째 만나고는 상경에 임명했으며, 세 번째 만나고는 재상에 기용하여 1만 호의 후작에 봉했습니다. 당시 천하가 다투어 이를 알고자 했지요. 위제는 급하여 우경을 찾아갔고, 우경은 높은 자리와 많은 녹봉을 중시하지 않고 재상의 도장과 만호후의 작위를 버린 채 위제와 함께 몰래 이곳을 찾은 것은 그가 남의 곤란함을 생각하여 공자께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알기도 어렵지만 남을 알기도 쉽지 않습니다.
信陵君大慚, 駕如野迎之. 魏斉聞信陵君之初難見之, 怒而自剄. 趙王聞之, 卒取其頭予秦. 秦昭王乃出平原君帰趙.
신릉군대참 가여야영지. 위제문신릉군지초난견지 노이자경. 조왕문지 졸취기두여진. 진소왕내출평원군귀조.
이 말을 들은 신릉군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손수 마차를 몰고 그들을 맞이하러 교외까지 나갔다. 위제는 신릉군이 곤란하다며 바로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이 일을 들은 조왕은 위제의 목을 잘라 진나라에 보냈고, 진 소왕은 그제야 평원군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昭王四十三年, 秦攻韓汾陘, 抜之, 因城河上広武.
소왕사십삼년 진공한분형 발지 인성하상광무.
진 소왕 43년, 진나라는 한나라의 분형(汾陘)을 공격해 함락시킨 다음 황하 가까이 있는 광무산(廣武山)에 성을 쌓았다.
後五年, 昭王用應侯謀, 縦反閒売趙, 趙以其故, 令馬服子代廉頗將. 秦大破趙於長平, 遂囲邯鄲.
후오년 소왕용응후모 종반간매조 조이기고 영마복자대염파장. 진대파조어장평 수위한단.
그로부터 5년, 소왕은 응후(범수)의 계책을 받아들여 반간계로 조나라를 속였다. 조나라는 이 꾀임에 넘어가 마복군(馬服君, 조사)의 아들(조괄)을 염파(廉頗) 대신 장군에 임명했다. 진의 군대는 장평(長平)에서 조의 군대를 대파하고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已而與武安君白起有隙, 言而殺之. 任鄭安平, 使撃趙. 鄭安平為趙所囲, 急, 以兵二萬人降趙.
이이여무안군백기유극 언이살지. 임정안평 사격조. 정안평위조소위 급 이병이만인항조.
얼마 뒤 응후는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와 원수 사이가 되어 그를 모함하여 죽였다. 응후는 정안평을 추천하여 그에게 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정안평은 조나라의 군대에게 포위당해 상황이 급해지자 2만 명의 병사를 데리고 조나라에 항복해버렸다.
應侯席稿請罪. 秦之法, 任人而所任不善者, 各以其罪罪之. 於是應侯罪當収三族.
응후석고청죄. 진지법 임인이소임불선자 각이기죄죄지. 어시응후죄당수삼족.
이 일로 응후는 멍석을 깔고 앉아 죄받기를 기다렸다. 본래 진나라의 법에 사람을 추천하여 추천받은 사람이 죄를 범하면 추천한 사람도 같은 벌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응후의 죄는 삼족을 잡아들여 처벌해야 했다.
秦昭王恐傷應侯之意, 乃下令國中:「有敢言鄭安平事者, 以其罪罪之.」而加賜相國應侯食物日益厚, 以順適其意.
진소왕공상응후지의 내하영국중; ‘유삼언정안평사자 이기죄죄지’ 이가사상국응후식물일익후 이순적지의.
진 소왕은 응후가 불안해할까 염려되어 전국에 알리길 감히 정안평 일을 말하는 자는 정안평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재상 응후에게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물 등을 내려서 그의 마음을 다독거렸다.
後二歳, 王稽為河東守, 與諸侯通, 坐法誅. 而應侯日益以不懌.
후이세 왕계위하동수 여체후통 좌법주, 이응후일익이불역.
2년 뒤, 왕계가 하동 군수로서 제후와 내통하다가 법에 걸려 처형되었다. 이런 일들로 응후의 마음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昭王臨朝歎息, 應侯進曰:「臣聞『主憂臣辱, 主辱臣死』. 今大王中朝而憂, 臣敢請其罪.」
소왕임조탄식 응후진왈 ‘신문“주우신욕 주욕신사” 금대왕중조이우 신감청기죄’
어느 날 소왕이 조정에 앉아 한숨을 쉬자 응후가 나아가 ‘신은 “국왕이 근심하면 신하를 치욕을 당하고, 국왕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왕께서 조정에서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는 신이 부족한 탓이니 제게 벌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昭王曰:「吾聞楚之鉄剣利而倡優拙. 夫鉄剣利則士勇, 倡優拙則思慮遠. 夫以遠思慮而禦勇士, 吾恐楚之図秦也. 夫物不素具, 不可以應卒, 今武安君既死, 而鄭安平等畔, 內無良將而外多敵國, 吾是以憂.」
소왕왈 ‘오문초지철검이이창우졸. 부철검이즉사용 창우졸즉사려원. 부이원사려이어용사 오공초지도진야. 부물불소구 불가이응종 금무안군기사 이정안평등반 내무양장이외다적국 오시이우’
소왕은 ‘과인은 초나라의 철검이 대단히 날카롭지만 광대들은 서툴다고 들었는데, 철검이 날카롭다면 병사들은 용감할 것이고, 광대가 서툴다면 생각이 깊다는 것 아니겠소? 초왕이 깊은 계략으로 용감한 병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할까 두렵소. 일이란 평소 준비하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변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오. 지금 우리를 보면 무안군은 죽었고, 장안평 무리들은 적에게 투항했소. 나라 안에는 좋은 장수가 없고, 나라 밖에는 많은 적들이 노리고 있지 않소이까? 이래서 과인이 걱정하는 것이라오.”라고 했다.
欲以激勵應侯. 應侯懼, 不知所出. 蔡沢聞之, 往入秦也.
욕이격려응후. 응후구 부지소출. 채택문지 왕입진야.
소왕은 이런 말로 응후를 격려하려 한 것인데, 응후는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무렵 이런 이야기를 들은 채택(蔡澤)이 진으로 왔다.
蔡澤
蔡沢者, 燕人也. 遊學幹諸侯小大甚衆, 不遇. 而従唐挙相, 曰:「吾聞先生相李兌, 曰『百日之內持國秉』, 有之乎?」曰:「有之.」
채택자 연인야. 유학간제후소대심중 불우. 이종당거상 왈 ‘오문선생상이태 왈 “백일지내지국병” 유지호?’ 왈 ‘유지’
채택은 연(燕)나라 사람이다. 사방에서 유학했고, 크고 작은 여러 나라의 왕에게 유세하여 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그는 당거(唐擧)를 찾아가서 관상을 보이면서 ‘제가 듣기로 선생께서 이태(李兌)의 관상을 봐주면서 그에게 “100일 안에 나라 정권을 잡는다.”고 했다는데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당거는 ‘그런 적 있다.’라고 답했다.
曰:「若臣者何如?」唐挙孰視而笑曰:
왈 ‘약신자하여?’ 당거숙시이소왈:
이에 채택이 ‘그럼 제 관상은 어떻소?’라고 묻자 당거가 그를 꼼꼼히 본 다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先生曷鼻, 巨肩, 魋顔, 蹙齃, 膝攣. 吾聞聖人不相, 殆先生乎?」
‘선생갈비 거비 퇴안 축알 슬련. 오문성인불상 태선생호?’
‘선생은 매부리코에 목보다 높은 어깨, 곰같은 얼굴, 쭈그러진 콧대에 다리마저 활처럼 휘어 있군요. 제가 듣기에 “성인은 관상으론 모른다.”고 하던데 아마 선생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蔡沢知唐挙戯之, 乃曰:「富貴吾所自有, 吾所不知者壽也, 願聞之.」唐挙曰:「先生之壽, 従今以往者四十三歳.」蔡沢笑謝而去, 謂其禦者曰:「吾持粱刺歯肥, 躍馬疾駆, 懐黃金之印, 結紫綬於要, 揖譲人主之前, 食肉富貴, 四十三年足矣.」
채택지당거휘지 내왈 '부귀오소자유 오소부지자수야 원문지' 당거왈 '선생지수 종금이왕자사십삼세' 채택소사이거 위기어자왈 '오지양자치비 약마질구 회왕금지인 결자수어요 섭양인주지전 식육부귀 사십삼년족의'
채택은 당거가 자신을 비웃는 줄 알고는 “부귀는 본디 갖고 태어나는 것, 나는 수명을 모르니 그것을 듣고 싶소.”라고 했다. 당거가 “선생의 수명은 지금부터 43년을 더 살 수 있소.”라고 했다. 채택이 웃고는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떠나면서 자신의 마부에게 말하기를 '내가 쌀밥과 고기반찬에 좋은 말을 타면서 황금으로 된 도장을 품고, 허리에는 붉은 비단 띠를 매고 왕 앞에서 절을 올리면서 녹봉을 받아 부귀하게 살 수 있다면 43년이면 충분하지'라고 했다.
去之趙, 見逐. 之韓、魏, 遇奪釜鬲於塗. 聞應侯任鄭安平、王稽皆負重罪於秦, 應侯內慚, 蔡沢乃西入秦.
거지조 견축. 지한 위 우탈부력어도. 문응후임정안평 왕계개부중죄어진 응후내참 채택내서입진.
채택이 당거와 헤어져 조나라로 갔으나 쫓겨났다. 한나라와 위나라로 가다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 밥 짓는 도구까지 빼앗겼다. 그런데 응후가 추천한 정안평과 왕계가 모두 진나라에 큰 죄를 짓는 통에 응후가 속으로 죄스러워한다는 말을 들었다. 채택은 바로 서쪽 진나라로 향했다.
將見昭王, 使人宣言以感怒應侯曰:「燕客蔡沢, 天下雄俊弘辯智士也. 彼一見秦王, 秦王必困君而奪君之位.」
장견소왕 사인선언이감노응후왈 ‘연객채택 천하웅준홍변지사야. 피일견진왕 진왕필곤군이탈군지위’
그는 소왕과 만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자기 자랑으로 응후를 자극하려고 ‘연나라의 유세객 채택은 천하에 뛰어난 유세가이다. 그가 진왕을 만나기만 하면 진왕은 틀림없이 그를 좋아하게 되어 범수가 곤란해질 것이고, 끝내는 범수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리게 했다.
應侯聞, 曰:「五帝三代之事, 百家之説, 吾既知之, 衆口之辯, 吾皆摧之, 是悪能困我而奪我位乎?」使人召蔡沢. 蔡沢入, 則揖應.
응후문 왈 ‘오제삼대지사 백가지세 오기지지 중구지변 오개최지 시악능곤아이탈아위로?’ 사인소채택. 채택입 즉읍응.
응후가 이 소문을 듣고 ‘오제와 삼왕의 사적, 백가의 학설이라면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또 유세가들의 교묘한 말들을 내가 다 물리쳤다. 그런데 그가 어찌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내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라 하고는 사람을 보내 채택을 불렀다. 채택이 와서 응후를 만났는데 가볍게 읍(고개만 숙였다)만 했다.
應侯固不快, 及見之, 又倨, 應侯因譲之曰:「子嘗宣言欲代我相秦, 寧有之乎?」対曰:「然.」應侯曰:「請聞其説.」蔡沢曰:
응후고불쾌 급견지 우거 응후인양지왈 ‘자상선언욕대아상진 영유지호?’ 대왈 ‘연’ 응후왈 ‘청문기세’ 채택왈:
응후는 당초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채택을 만났는데, 채택이 또 매우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응후는 ‘그대가 자신을 자랑하며 나를 대신하여 재상이 된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닌다는데 그게 사실이오?’라며 채택을 꾸짖었다. 채택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응후는 이에 ‘그럼 당신 말을 한번 들어봅시다.’라고 하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籲, 君何見之晩也! 夫四時之序, 成功者去. 夫人生百體堅彊, 手足便利, 耳目聡明而心聖智, 豈非士之願與?」
‘유 군하견지만야! 부사시지서 성공자거. 부인생백체견강 수족편리 이모총명이심성지 기비사지원여?’
‘어찌 그것을 아직 모르고 계신단 말입니까? 사계절은 서로 돌고 돌아 각자의 일을 마치고 물러갑니다. 인생이란 몸과 팔다리 성하고, 귀와 눈 밝고, 마음은 지혜로워지는 것, 이것이 뜻을 가진 사람의 바라는 바 아니겠습니까?’
應侯曰:「然.」蔡沢曰:
응후왈 ‘연’ 채택왈:
응후가 ‘그렇소.’라고 하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質仁秉義, 行道施徳, 得志於天下, 天下懐樂敬愛而尊慕之, 皆願以為君王, 豈不辯智之期與?」
‘질인병의 행도시덕 득치어천하 천하회락경애이존모지 개원이위군왕 기불변지지기여?’
‘어짊을 근본으로 삼고 정의를 가지고 원칙대로 법을 집행하고 덕을 베푼다면 천하에 자기 뜻을 펼치는 것이 되고, 천하 백성들이 기꺼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여 모두 그 사람이 자신들의 군주가 되길 바란다면 이야말로 지혜와 모략을 가진 유세가가 바라는 바 아니겠습니까?’
應侯曰:「然.」蔡沢複曰:
응후왈 ‘연’ 채택복왈:
응후가 “그렇지”라고 하자 채택은 또 이렇게 말했다.
「富貴顕栄, 成理萬物, 使各得其所;性命壽長, 終其天年而不夭傷;天下継其統, 守其業, 傳之無窮;名実純粋, 沢流千里, 世世稱之而無絶, 與天地終始:豈道徳之符而聖人所謂吉祥善事者與?」應侯曰:「然.」蔡沢曰:
‘부귀현영 성리만물 사각득기소; 선명수장 종기천년이불요상; 천하계기통 수기업 전지무궁; 명실순수 택류천리 세세칭지이무절 여천지종시; 기도덕지부이성인소위길상선사자여?’ 응후왈 ‘연' 채택왈:
‘부귀영달하고 모든 사물을 조절하여 그것들을 각자 자리에 맞게 잘 안배하고, 요절하지 않고 장수하여 천수를 누리면서 천하가 그 전통을 잇고 그 사업을 지켜 영원히 전해지게 하고, 명성과 실제가 하나가 되어 그 은덕이 멀리 퍼져 대대손손 끊이질 않고 천지와 함께 영원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도를 실천하고 덕을 베푼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며, 성인께서 말하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응후가 ‘맞는 말이오.’라고 하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若夫秦之商君, 楚之呉起, 越之大夫種, 其卒然亦可願與?」
‘역부진지상군 초지오기 월지대부종 기졸연역가원여?’
‘저 진나라의 상군(商君, 상앙), 초나라의 오기(吳起), 월나라의 대 종(種, 문종)과 같은 사람들이라면 뜻있는 사람이 바라고 원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應侯知蔡沢之欲困己以説, 複謬曰:
응후지채택지욕긴기이세 복유왈:
응후는 채택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 설득할 속셈임을 알아채고는 마음과는 다른 반대의 말을 내세워 이렇게 말했다.
「何為不可? 夫公孫鞅之事孝公也, 極身無弐慮, 盡公而不顧私;設刀鋸以禁姦邪, 信賞罰以致治;披腹心, 示情素, 蒙怨咎, 欺舊友, 奪魏公子卬, 安秦社稷, 利百姓, 卒為秦禽將破敵, 攘地千里.
‘하위불가 부공손앙지사횽공야 극신무이여 진공이불고사; 설도거이금간사 신상벌이치지; 피복심 시정소 몽원구 기구우 탈위공자앙 안진사직 이백성 졸위진금장파적 양지천리.
‘바라서 안 될 것이 무엇이겠소? 공손앙(상앙)은 진 효공(孝公)을 섬기면서 끝까지 한마음으로 나라에 충정을 다하면서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았소. 그는 법령을 만들어 간사함을 근절하고, 상벌을 제대로 실시하여 세상을 바로잡았소. 진정한 마음과 충심을 펼침에 있어서 남의 원한을 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옛 친구를 속여 위 공자 앙을 사로잡았소. 진나라의 사직을 안정시키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는 등 끝까지 진나라를 위해 적의 장수를 잡고 적을 물리치고 땅을 넓혔소.
呉起之事悼王也, 使私不得害公, 讒不得蔽忠, 言不取苟合, 行不取苟容, 不為危易行, 行義不辟難, 然為霸主強國, 不辭禍凶.
오기지사도왕야 사사부득해공 참부득폐충 언불위구합 생불취구용 불위위이행 행의불피란 연위패주강국 불사화흉.
오기는 초 도왕(悼王)을 섬기면서 사사로운 이익이 공익을 해치지 못하게 하고, 모함하는 자들이 충직한 말을 막지 못하게 했으며, 억지로 말을 꾸미지도 도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구차히 하지도 않았으며, 위기를 당해서도 원칙을 바꾸지 않고 의를 행함에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소. 군주를 패주로 만들고 나라를 강하게 하는 일이라면 화와 재앙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소.
大夫種之事越王也, 主雖困辱, 悉忠而不解, 主雖絶亡, 盡能而弗離, 成功而弗矜, 貴富而不驕怠. 若此三子者, 固義之至也, 忠之節也.
대부종지사월와야 주수인욕 실충이불해 주수절망 진능이불리 성공이불긍 귀부이불교태. 챡차삼자자 고의지지야 충지절야.
대부 종은 월왕을 섬기면서 군주가 곤경에 처하고 치욕을 당하더라도 충성을 다하고 태만하지 않았소. 그는 또 군주의 대가 끊기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도 자기 힘을 다 바치면서 떠나지 않았소. 공업을 이룬 뒤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재물과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으며, 교만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소. 이 세 사람의 행동은 절개의 기준이고, 정절의 모범이 아니겠소?
是故君子以義死難, 視死如帰;生而辱不如死而栄. 士固有殺身以成名, 雖義之所在, 雖死無所恨. 何為不可哉?」
시고군자이의사란 시사여귀; 생이욕불여사이영. 사고유살신이성명 수의지소재 수사무소한. 하위불가재?’
그러니 군자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렵더라도 몸을 맡기고, 정의를 위해서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살아서 욕을 보느니 죽어서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이오. 뜻있는 사람은 본디 몸을 죽여 이름을 남기고, 정의를 위해 죽음조차 사양하지 않소. 그러니 어찌 이 세 사람이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될 수 없겠소?’
蔡沢曰:「主聖臣賢, 天下之盛福也;君明臣直, 國之福也;父慈子孝, 夫信妻貞, 家之福也.
채택왈 ‘주성신현 천하지성복야; 군명신직 국지복야; 부자자효 부신처정 가지복야.
이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어질고 덕이 있고, 신하는 충성스럽고 현명하면 천하 백성들에게 가장 큰 행복입니다. 군주는 밝고 뛰어나며, 신하는 정직하면 나라의 행복입니다. 부모는 자상하고 자신은 효성스러우며, 남편은 믿음직하고, 아내는 정숙하면 한 집안의 행복입니다.
故比幹忠而不能存殷, 子胥智而不能完呉, 申生孝而晉國亂. 是皆有忠臣孝子, 而國家滅亂者, 何也? 無明君賢父以聴之, 故天下以其君父為僇辱而憐其臣子. 今商君、呉起、大夫種之為人臣, 是也;其君, 非也. 故世稱三子致功而不見徳, 豈慕不遇世死乎?
고비간충이불능존은 자서지이불능완오 신생자이진국란. 시개유충신효자 이국가멸란자 하야? 무명군현부이청지 고천하이기군부위륙욕이린기신자. 금상군 오기 대부종이위인신 시야; 기군 비야. 고세칭삼자치공이불견덕 기모불우세사호?
비간(比干)은 충성스러웠지만 은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자서(子胥)는 지혜로웠지만 오나라를 보전하지 못했고, 신생(申生)은 효성스러웠지만 진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습니다. 이들 모두 충신이자 효자였습니다만 나라와 집안이 어지러워지고 망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영명한 군주, 현덕한 아비가 없어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은 이런 군주와 아비를 천하다 여기고, 이런 신하와 아들을 가엾게 여긴 것입니다. 상군, 오기, 대부 종은 신하로서 훌륭했지만 그들의 군주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세 사람이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지만 세상을 만나지 못하고 죽은 것을 부러워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夫待死而後可以立忠成名, 是微子不足仁, 孔子不足聖, 管仲不足大也. 夫人之立功, 豈不期於成全邪? 身與名倶全者, 上也. 名可法而身死者, 其次也. 名在僇辱而身全者, 下也.」於是應侯稱善.
부대사이후가이입충성명 시미자부족인 공자부족성 관중부족대야. 부인지입공 기불기어성전야? 신여명구전자 상야. 명가법이신사자 기차야. 명재육욕이신전자 하야’ 어시응후칭선.
죽은 뒤에 입신공명하는 것이라면 미자(微子)도 어진 사람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이고, 공자도 성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며, 관중 역시 위대한 사람이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공을 세움에 있어서 완전함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숨과 공명을 다 이루는 것이 가장 좋고, 공명은 후대에 모범이 될 만 했으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 것이 그다음이고, 공명은 치욕스러운데 목숨을 보전한 것이 맨 아래입니다.’이 말을 들은 응후는 채택의 생각을 칭찬했다.
蔡沢少得閒, 因曰:「夫商君、呉起、大夫種, 其為人臣盡忠致功則可願矣, 閎夭事文王, 周公輔成王也, 豈不亦忠聖乎? 以君臣論之, 商君、呉起、大夫種其可願孰與閎夭、周公哉?」應侯曰:「商君、呉起、大夫種弗若也.」
채택소득간 인왈 ‘부상군 오기대부종 기위인신진충치공즉가현의 굉요사문왕 주공보성왕애 기불역충성호? 이군신론지 상군 오기 대부종기가현숙여굉요 주공재?’ 응후왈 ‘상군 오기 대부종불약야’
채택은 비로소 인정을 받고는 그 틈에 ‘상군, 오기, 대부 종이 신하 된 자로서 충성을 다해 공업을 세운 점은 부러워할 만합니다. 굉요(閎夭)가 주 문왕을 섬기고, 주공이 주 성왕을 보좌한 것 또한 충성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원만한 군주와 신하의 사이라는 점에서 볼 때, 상군, 오기, 대부 종 세 사람을 굉요, 주공과 비교하자면 뜻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쪽을 바라겠습니까?’라고 묻자 응후는 ‘상군, 오기, 대부 종은 비교할 바가 못 되지요.라고 대답했다.
蔡沢曰:「然則君之主慈仁任忠, 惇厚舊故, 其賢智與有道之士為膠漆, 義不倍功臣, 孰與秦孝公、楚悼王、越王乎?」應侯曰:「未知何如也.」
채택왈 ‘연즉군지주자인임충 순후구고 기현지여유도지사위교칠 의불배공신 숙여진효공 초도왕 월왕호?’ 응후왈 ‘미지하여야’
채택이 ‘그렇다면 선생의 주상이라면 인자하고 충신들을 믿으며, 옛 친지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어질고 지혜로워서 선비와 굳게 사귀며 의리를 지켜 공신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 효공, 초 도왕, 월왕 구천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응후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소.’라고 했다.
蔡沢曰:「今主親忠臣, 不過秦孝公、楚悼王、越王, 君之設智, 能為主安危修政, 治亂彊兵, 批患折難, 広地殖谷, 富國足家, 彊主, 尊社稷, 顕宗廟, 天下莫敢欺犯其主, 主之威蓋震海內, 功彰萬里之外, 聲名光輝傳於千世, 君孰與商君、呉起、大夫種?」應侯曰:「不若.」
채택왈 ‘금주친충신 불과진효공 초도왕 월왕 군지설지 능위주안위수정 치란강병 비환절란 광지식곡 부국족가 강주 존사직 현종묘 천하막감기범기주 주지위새진해내 공창만리지외 성명광휘전어천세 군숙여상군 오기 대부종?’ 응후왈 ‘불약’
이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주상께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가까이하심이 진 효공, 초 도왕, 월왕 구천을 넘지는 못하십니다. 군께서 총명한 재능을 펼쳐 주상을 위해 정국을 안정시켜 정치를 바로잡고, 군사를 훈련시켜 난리를 평정하고, 재앙을 물리쳐 어려움을 이겨내고, 땅을 넓혀 농사를 발전시켜 나라 창고를 채우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주상의 권력을 강하게 만들어 나라의 위엄을 높이고 왕실을 빛나게 했으니 누가 감히 군의 주상을 업신여기거나 범할 수 있겠습니까? 주상의 명성은 전 중국을 울리고 공업은 만 리 밖에서도 빛이 납니다. 또 그 빛나는 이름은 만대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신을 상군, 오기, 대부 종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응후가 ‘나는 비교도 안되지요.’했다.
蔡沢曰:「今主之親忠臣不忘舊故不若孝公、悼王、句踐, 而君之功績愛信親幸又不若商君、呉起、大夫種, 然而君之祿位貴盛, 私家之富過於三子, 而身不退者, 恐患之甚於三子, 竊為君危之.
채택왈 ‘금주지친충신불망구고불약효공 도왕 구천 이군지공적애신친행우불약상군 오기 대부종 연이군지록위귀성 사가지부과어삼자 이신불퇴자 공환지심어삼자 규위군위지.
채택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주상께서 충신을 가까이하고 옛정을 잊지 못하는 것은 진 효공, 초도왕, 월왕 구천에 미치지 못하고, 군의 공적, 총애, 신임 또한 상군, 오기, 대부 종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군의 녹봉은 많고 지위는 높고 가산은 부유하기가 이들 세 사람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군께서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계신다면 아마 군께서 받을 화와 근심은 그 세 사람보다 더 심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것이 저는 두렵습니다.
語曰『日中則移, 月満則虧』. 物盛則衰, 天地之常數也. 進退盈縮, 與時変化, 聖人之常道也. 故『國有道則仕, 國無道則隠』. 聖人曰『飛竜在天, 利見大人』.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今君之怨已讎而徳已報, 意欲至矣, 而無変計, 竊為君不取也.
어왈 “일중즉이 월만즉휴” 물성즉쇠 천지지상수야, 진퇴영축 여시변화 성인지상도야. 고 “국유도즉사 국무도즉은” 성인왈 “비룡재천 이견대인” “불의이부차위 어아여부운” 금군지원이수이덕이보 의욕지의 이무변계 규위군불취야.
속담에 "양이 높이 솟았다가 서쪽으로 지고, 달도 차면 곧 기운다.”라고 했습니다. 사물이 활짝 피어 끝에 이르면 바로 시듭니다. 이는 천지만물의 보편적 법칙입니다. 나아감과 물러남을 때에 적절하게 맞추는 것이 성인의 당당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정치가 바르면 나아가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나 숨는 것이 이치다.”라고 한 것입니다. 성인이 이르시길 “용이 하늘을 잘 날면 위인들에게 이롭다”라거나 “원칙에서 벗어난 부귀는 내게 뜬구름과 같다.”라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군께서는 원한도 은혜도 다 갚았습니다. 마음을 먹은 바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데도 시세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지 않고 계십니다. 공을 위해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且夫翠、鵠、犀、象, 其処勢非不遠死也, 而所以死者, 惑於餌也. 蘇秦、智伯之智, 非不足以辟辱遠死也, 而所以死者, 惑於貪利不止也.
차부취 곡 서 상 기처세비불원사야 이소이사자 혹어이야. 소진 지백지지 비부족이피욕원사야 이소이사자 혹어탐리부지야.
물총새, 고니, 코뿔소, 코끼리 등은 살고 있는 곳이 그렇게 안전하지 않지만 그런대로 천수를 누립니다. 그런데도 잡혀 죽는 것은 먹이에 욕심을 내기 때문입니다. 소진(蘇秦)과 지백(智伯)은 그 재능이 치욕을 피하고 죽음을 멀리하기에 넉넉했음에도 죽은 까닭은 욕심에 홀려 그만 둘 때에 그만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是以聖人制禮節欲, 取於民有度, 使之以時, 用之有止, 故志不溢, 行不驕, 常與道倶而不失, 故天下承而不絶.
시이성이제예절욕 취어민유도 사지이시 용지유지 고지불일 행불교 상여도구이불실 고천하승이부절.
이런 까닭에 성인은 예법을 정해 욕심을 절제했으며, 백성에게 세금을 거둘 때도 한도가 있었고, 백성을 부릴 때도 한가한 때를 고르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지나치지 않고 행동은 교만하지 않아 늘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는 끊이지 않고 그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昔者斉桓公九合諸侯, 一匡天下, 至於葵丘之會, 有驕矜之志, 畔者九國. 呉王夫差兵無敵於天下, 勇彊以軽諸侯, 陵斉晉, 故遂以殺身亡國.
석자제환공구합제후 일광천하 지어채구지회 유교긍지지 반자구국. 오왕부차병무적어천하 용강이경제후 릉제진 고수이살신망국.
옛날 제 환공(桓公)은 아홉 번이 제후들을 모아 처음으로 천하를 평정했지만 규구(葵丘)의 회맹에서 자만과 교만으로 자신에게 속해 있던 여러 나라를 배반했습니다. 오왕 부차(夫差)의 군대는 천하무적이었지만 강함을 자랑하고 다른 나라들을 가볍게 보아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끝내 자신은 죽임을 당하고 나라는 패망했던 것입니다.
夏育、太史噭叱呼駭三軍, 然而身死於庸夫. 此皆乗至盛而不返道理, 不居卑退処倹約之患也.
하육 태사교질호해삼군 연이신사어용부. 차개승지성이불반도리 불거비퇴처검약지환야.
하육(夏育)이나 태사교(太史噭)는 성이 나서 한 번 고함을 지르면 삼군이 놀랄 정도의 용사였지만 보잘 것 없는 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 모두 공명이 극에 달했음에도 자신을 돌아보아 처세의 이치에 맞는지를 따지지 않았고, 겸손과 검약을 지키지 않다가 화를 초래한 것입니다.
夫商君為秦孝公明法令, 禁姦本, 尊爵必賞, 有罪必罰, 平権衡, 正度量, 調軽重, 決裂阡陌, 以靜生民之業而一其俗, 勧民耕農利土, 一室無二事, 力田蓄積, 習戦陳之事, 是以兵動而地広, 兵休而國富, 故秦無敵於天下, 立威諸侯, 成秦國之業. 功已成矣, 而遂以車裂.
부상군위진효공명법령 금간본 족작필상 유죄필벌 평권형 정도량 조경중 결열천맥 이정생민지업이일기속 권민경농이사 이실무이사 역전축적 습전진지사 시이병동이지광 병휴이국부 고진무적어천하 입위제후 성진국지업. 공이성의 이수이거열.
상군은 진 효공을 위해 법령을 다듬어 사악의 뿌리를 막고, 공적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을 내리고, 죄의 크고 작음에 근거하여 벌을 주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시장을 조절했으며, 논밭 사이의 이랑을 정돈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풍속을 바로잡았습니다.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고 토지를 충분히 이용하여 집집마다 농사에 있는 힘을 다하게 하되 다른 쓸데없는 일이 농사에 방해가 되지 않게 했습니다. 이렇게 농사에 힘을 쏟아 식량을 비축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니 전쟁 때마다 땅을 넓혔고, 전쟁이 없을 때는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이렇게 진나라는 천하무적이 되어 밖으로 위신을 세우고 진나라의 공업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공업을 다 세우자 결국 상군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楚地方數千里, 持戟百萬, 白起率數萬之師以與楚戦, 一戦挙鄢郢以焼夷陵, 再戦南並蜀漢. 又越韓、魏而攻彊趙, 北阬馬服, 誅屠四十餘萬之衆, 盡之於長平之下, 流血成川, 沸聲若雷, 遂入囲邯鄲, 使秦有帝業.
초지방수천리 지극백만 백기솔수만지사이여초전 일전거언영이소이릉 재전남병촉한. 우월한 위이공강조 북항마복 주도사십여만지중 진지어장평지하 유혈성천 불성약뢰 수입위한단 사진유제업.
그리고 초나라의 땅은 사방 수천 리에 무장한 병사가 100만에 이르는 큰 나라였으나 백기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와 싸워서 첫 번째에 언(鄢), 영(郢)을 함락시키고 이릉(夷陵)을 불살랐고, 두 번째에는 촉(蜀)나라와 한중(漢中)을 합병했습니다. 또 한나라와 위나라를 넘어 강한 조나라를 쳐서 북방에서 마복군(馬服君)의 아들을 생매장시키고 40만이 넘는 병사들을 모조리 장평성(長平城) 아래에서 죽이니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루고 울부짖는 소리는 하늘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하여 진나라의 제업(帝業)을 위한 기초를 세웠습니다.
楚、趙天下之彊國而秦之仇敵也, 自是之後, 楚、趙皆懾伏不敢攻秦者, 白起之勢也. 身所服者七十餘城, 功已成矣, 而遂賜剣死於杜郵.
초 조천하지강국이진지구적애 자시지후 초 조 개섭복불패공진자 백기지세야. 신소복자칠십여성 공이성의 이수사검사어두우.
원래 초나라와 조나라는 천하의 강국으로 진나라의 원수였지만 이로부터 초나라와 조나라는 모두 굴복하고 감히 진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니 이는 백기의 위세 때문이었습니다. 백기는 몸소 70여 개의 성을 정복하는 공업을 이루었으나 끝내 왕의 명을 받고 두우(杜郵)에서 자살했습니다.
呉起為楚悼王立法, 卑減大臣之威重, 罷無能, 廃無用, 損不急之官, 塞私門之請, 一楚國之俗, 禁遊客之民, 精耕戦之士, 南収楊越, 北並陳、蔡, 破橫散従, 使馳説之士無所開其口, 禁朋黨以勵百姓, 定楚國之政, 兵震天下, 威服諸侯. 功已成矣, 而卒枝解.
오기위초도왕입법 비감대신지위중 파무능 폐무용 손불급지관 색사문지청 일초국지속 금유객지민 정경전지사 남수양월 북병진 채 파횡산종 사치세지사무소개기구 금붕당이여백성 정초국지정 병진천하 위복제후. 공이성의 이졸기해.
오기는 초 도왕(悼王)을 위해서 법령을 제정하고 대신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무능하고 쓸모없는 신하를 내치고 중요하지 않은 자리를 줄였으며, 사적인 청탁을 물리치고 초나라의 풍속을 하나로 만들어 백성들이 놀고 즐기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농업을 장려하고 군대를 훈련시켜 남으로 양월(楊越)을 되찾고 북으로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아우르고 연횡이나 합종의 정책을 포기하여 유세를 일삼고 다니는 책사들의 입을 막았으며, 당파 짓는 일을 금하고 백성들을 격려하여 초나라의 정국을 안정시키니 군대는 천하에 용맹함을 떨치고 제후들을 굴복시켜 공업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大夫種為越王深謀遠計, 免會稽之危, 以亡為存, 因辱為栄, 墾草入邑, 辟地殖谷, 率四方之士, 専上下之力, 輔句踐之賢, 報夫差之讎, 卒擒勁呉. 令越成霸. 功已彰而信矣, 句踐終負而殺之.
대부종위월왕심모원계 면회계지위 이망위존 인욕위영 간초입읍 치지식곳 솔사방지사 전상하지역 보구천지현 보부차지수 졸금경오. 영월성패. 공이창이신의 구천종부이살지.
대부 종은 월왕을 위해 깊고도 심오한 계책을 세워 회계에서 나라가 망하는 위험을 모면하게 했으며, 멸망할 나라를 되살림으로써 치욕을 영예로 바꾸었습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마을을 다시 세웠습니다.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사방 인재들을 이끌고 상하의 힘을 모아 현명한 구천을 도와 부차에게 당한 원수를 갚고 강대한 오를 멸망시킴으로써 월나라를 패주로 만들었습니다. 그 공훈은 너무 두드러졌고, 사람들도 다 그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구천은 끝내 은혜를 저버리고 그를 죽였습니다.
此四子者, 功成不去, 禍至於此. 此所謂信而不能詘, 往而不能返者也. 範蠡知之, 超然辟世, 長為陶朱公.
차사자자 공성불거 화지어차. 차소위신이불능굴 왕이불능반자야. 범려지지 초연피세 장위도주공.
이 네 사람은 공업을 완성하고 물러날 때에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람들이 말하는 ‘펴고 굽힐 줄 모르고, 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범려(範蠡)는 이런 이치를 알았습니다. 초연히 세속을 떠나 오랫동안 스스로를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렀습니다.
君獨不観夫博者乎? 或欲大投, 或欲分功, 此皆君之所明知也. 今君相秦, 計不下席, 謀不出廊廟, 坐制諸侯, 利施三川, 以実宜陽, 決羊腸之険, 塞太行之道, 又斬範、中行之塗, 六國不得合従, 桟道千里, 通於蜀漢, 使天下皆畏秦.
군독불관부박자로? 혹욕대투 혹욕분공 차개군지소명지야. 금군상진 계불하석 모불출랑묘 좌제제후 이시삼천 이실의양 결양장지험 색태행지도 우참범 중행지도 육국부득합종 잔도천리 통어촉한 사천하개외진.
군께서는 도박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크게 승부를 단번에 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끈기 있게 조금씩 승부를 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군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군은 진나라의 재상을 맡아 앉은 자리에서 계획을 꾸미되 조정을 떠날 필요도 없이 앉은 그곳에서 계책으로 각국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삼천(三川) 지역을 개척하고, 의양(宜陽)을 충실하게 하고, 구절양장 같은 험한 요새를 돌파해 태행산(太行山)의 길을 막으며, 또 범(范)과 중행(中行)으로 통하는 길을 절단해 여섯 나라로 하여금 연합하지 못하게 하고, 천리나 되는 잔교(棧橋)를 이용해 촉나라와 한중을 연결하니 천하 각국이 모두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秦之欲得矣, 君之功極矣, 此亦秦之分功之時也. 如是而不退, 則商君、白公、呉起、大夫種是也.
진지욕득의 군지공극의 차역진지분공지시야. 여시우불퇴 즉상군 백공 오기 대부종시야.
진나라가 바라던 일은 이루어졌고, 군의 공은 이미 극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진나라는 도박할 때처럼 돈을 나누어 걸어서 이익을 조금씩 취하듯이 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물러나지 못하면 바로 상군, 백기, 오기, 대부 종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
吾聞之, 『鑒於水者見面之容, 鑒於人者知吉與凶』. 書曰『成功之下, 不可久処』. 四子之禍, 君何居焉? 君何不以此時帰相印, 譲賢者而授之, 退而巌居川観, 必有伯夷之廉, 長為應侯. 世世稱孤, 而有許由、延陵季子之譲, 喬松之壽.
오문지 “감어수자견면지용 감어인자지길여흉” 서왈 “성공지하 불가구처” 사자지화 군하거언? 군하불이차시귀상인 양현자이수지 퇴이암거천관 필유백이지렴 장위응후. 세세칭고 이유허유 연릉계자지양 교송지수.
저는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추측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옛 책에는 “공을 이룬 곳에는 오래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들 네 사람이 받은 재앙을 군께서 왜 또 이어받으려고 하십니까? 군은 어째서 이 기회에 재상에서 물러나 다른 유능한 사람에게 물려준 다음 바위 밑에서 살면서 물가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살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하신다면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같은 고결하고 아름다운 명성을 들을 것이고, 오래도록 응후라는 작위를 누리면서 대대로 깨끗했다는 칭찬을 들을 것이며, 허유(許由)와 연릉(延陵) 계자(季子)와 같이 사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칭송받을 것이며, 왕자 교(喬)와 적송자(赤松子)와 같이 장수할 것입니다.
孰與以禍終哉? 即君何居焉? 忍不能自離, 疑不能自決, 必有四子之禍矣. 易曰『亢竜有悔』, 此言上而不能下, 信而不能詘, 往而不能自返者也. 願君孰計之!」
숙여이화종재? 즉군하거언? 인불능자리 의불능자결 필유사자지화의. 역왈 “항룡유회” 차언상이불능하 신이불능굴 왕이불능자반자야. 원군숙계지!’
이것과 화를 입고 일생을 마치는 것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군께서는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만일 지금의 지위를 떠나는 것이 아까워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신다면 틀림없이 그 네 사람과 같은 화를 당할 것입니다. 『역경』에 “끝까지 올라간 용은 뉘우칠 날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오르기만 하고 내려올 줄 모르고, 뻗을 줄만 알고 굽힐 줄을 모르며, 나아가는 것만 알고 돌아설 줄을 모르는 사람을 비유한 말입니다. 이를 숙고하시길 바라옵니다.”
應侯曰:「善. 吾聞『欲而不知足, 失其所以欲;有而不知足, 失其所以有』. 先生幸教, 睢敬受命.」於是乃延入坐, 為上客.
응후왈 ‘선 오문 “욕이부지족 실기소이욕; 유이부지족 실기소이유” 선생행교 수경수명’ 어시내연입좌 위상객.
응후는 ‘좋은 말씀이오, 나 역시 “욕심을 부리며 그칠 줄을 모르면 그 욕심부린 것마저 잃고, 차지하기만 하고 만족할 줄 모르면 가진 것조차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다행히 선생께서 내게 가르침을 주셨으니 삼가 그것을 따르겠소.’라 하고는 채택을 안으로 맞아들여 상등 빈객으로 우대했다.
後數日, 入朝, 言於秦昭王曰:「客新有従山東來者曰蔡沢, 其人辯士, 明於三王之事, 五伯之業, 世俗之変, 足以寄秦國之政. 臣之見人甚衆, 莫及, 臣不如也. 臣敢以聞.」
후수일 입조 언어진소왕왈 : ‘객신유종산동래자왈채택 기인변사 명어삼왕지사 오백지업 세속지변 족이기진국지정. 신지견인심중 막급 신불여야 신감이문’
며칠 뒤 범수가 조정에 들어가 진 소왕에게 ‘채택이라는 빈객이 산동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말재주가 뛰어나고, 3왕 5제의 일에 밝고 세속의 변화에 통달하여 진나라의 정무를 맡기기에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신이 만나 본 사람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도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신이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을 올립니다.’라고 했다.
秦昭王召見, 與語, 大説之, 拝為客卿. 應侯因謝病請帰相印. 昭王彊起應侯, 應侯遂稱病篤. 範睢免相, 昭王新説蔡沢計畫, 遂拝為秦相, 東収周室.
진소왕소견 여어 대열지 배위객경. 응루인사병청 귀상인. 소왕강기응후 응후수칭병독. 범수면상 소왕신열채택계획 수배위진상 동수주실.
진 소왕이 채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다음 매우 만족하여 그를 객경에 임명했다. 응후는 이 기회에 병을 핑계로 재상의 도장을 반납했다. 소왕은 응후에게 일을 계속 맡도록 했으나 응후는 병이 심하다며 사양했다. 이렇게 해서 범수는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소왕은 채택의 새로운 계책을 듣고 만족하여 그를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채택은 동으로 주나라 땅을 차지했다.
蔡沢相秦數月, 人或悪之, 懼誅, 乃謝病帰相印, 號為綱成君. 居秦十餘年, 事昭王、孝文王、荘襄王. 卒事始皇帝, 為秦使於燕, 三年而燕使太子丹入質於秦.
채택상진수월 인혹오지 구주 내사병귀상인 호위망성군. 거진십여년 사소왕 효문왕 장양왕. 종사시황제 위진사어연 삼년이연사태자단입질어진.
채택이 진나라의 재상이 된 지 몇 달 뒤 누군가 그를 모함했다. 채택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병을 구실로 재상의 도장을 반납했고, 소왕은 강성군에 그를 봉했다. 그는 진나라에 10년 넘게 머무르면서 소왕, 효문왕, 장양왕을 모셨다. 마지막에 진시황을 섬기면서 연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3년 뒤 연나라는 태자 단을 인질로 진나라에 보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韓子稱「長袖善舞, 多銭善賈」, 信哉是言也! 範睢、蔡沢世所謂一切辯士, 然遊説諸侯至白首無所遇者, 非計策之拙, 所為説力少也.
태사공왈; 한자칭 ‘장유선무 다전선가’ 신재시언야! 범수 채택세소위일절변사 연유세제후지자수무소우자 비계책지졸 소위세력소야.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한비자가 ‘옷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밑천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믿을 만한 말이다. 범수와 채택은 사람들이 말하는 ‘일체(一體)변사’들이었다. 그럼에도 여러 나라를 돌면서 백발이 되도록 기회를 못 잡은 것은 계략과 전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유세한 나라들이 약하고 작았기 때문이다.
及二人羈旅入秦, 継踵取卿相, 垂功於天下者, 固彊弱之勢異也. 然士亦有偶合, 賢者多如此二子, 不得盡意, 豈可勝道哉! 然二子不困厄, 悪能激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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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두루 다닌 끝에 진나라에 머무르면서 잇따라 재상이란 높은 벼슬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것은 그들의 능력이 남보다 강한 반면 타인의 능력이 그들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선비는 우연히 때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이들 두 사람 못지않은 잘난 사람들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곤궁한 처지에 빠지지 않았던들 어찌 분발하여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