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七十八. 春申君列傳
春申君者, 楚人也, 名歇, 姓黃氏. 遊學博聞, 事楚頃襄王. 頃襄王以歇為辯, 使於秦. 秦昭王使白起攻韓、魏, 敗之於華陽, 禽魏將芒卯, 韓、魏服而事秦. 秦昭王方令白起與韓、魏共伐楚, 未行, 而楚使黃歇適至於秦, 聞秦之計.
춘신곤자 초인야 명헐 성황씨. 유학박문 사초경양왕. 경양왕이헐위변 사어진. 진소왕사백기공한 위 패지어화양 금위장망묘 한 위복이사진. 진소왕방영백기여한 위공벌초 미행 이초사황헐적지어진 문진지계.
춘신군(春申君)은 초(楚)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헐(歇), 성은 황씨(黃氏)이다. 두루 다니며 공부하여 박식했고, 경양왕(頃襄王)을 섬겼다. 경양왕은 황헐의 언변 때문에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 전에) 진 소왕(昭王)은 백기(白起)에게 한(韓)나라, 위(魏)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화양(華陽)에서 무찌르고 위나라의 장수 망묘(芒卯)를 사로잡았다. 한나라, 위나라는 굴복하고 진나라를 섬겼다. 이어 진 소왕은 백기에게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출병 전에 초나라의 사신 황헐이 마침 진나라에 이르러 진나라의 계책을 알게 되었다.
當是之時, 秦已前使白起攻楚, 取巫、黔中之郡, 抜鄢郢, 東至竟陵, 楚頃襄王東徙治於陳県. 黃歇見楚懐王之為秦所誘而入朝, 遂見欺, 留死於秦. 頃襄王, 其子也, 秦軽之, 恐壱挙兵而滅楚.
당시지시 진이전사백기공초 취무 검중지군 발언영 동지경릉 초경양왕동사치어진현. 황헐견초회양왕위진소유이입조 수견사 유사어진. 경양왕 기자야 진경지 공일거병이멸초.
당시 진나라는 이미 백기에게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군(巫郡), 검중군(黔中郡)을 취했고, 언영(鄢郢)을 빼앗은 다음 동쪽 경릉(竟陵)에까지 이르렀다. 초 경양왕은 도읍을 동쪽 진현(陳縣)으로 옮겼다. 황헐은 초 회왕(懷王)이 진나라의 꼬임에 빠져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결국 속아서 진나라에 억류당했다가 죽는 것을 보았다. 경양왕은 회왕의 아들로 진나라는 그를 깔보았다. (황헐은) (진나라가) 단번에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멸망시킬 것이 두려웠다. 이에 글을 올려 진 소왕에게 다음과 같이 유세했다.
天下莫彊於秦、楚. 今聞大王欲伐楚, 此猶両虎相與鬥. 両虎相與鬥而駑犬受其獘, 不如善楚. 臣請言其説:
천하막강어진 초. 금문대왕욕벌초 차유양호상여투. 양호상여투이노견수기폐 불여선초. 신청언기세:
천하에 진나라,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지금 듣자하니 대왕께서 초나라를 치려 하신다는데, 이는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약한 개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초나라와 잘 지내느니만 못합니다. 신이 그 이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臣聞物至則反, 冬夏是也;致至則危, 累棋是也. 今大國之地, 遍天下有其二垂, 此従生民已來, 萬乗之地未嘗有也. 先帝文王、荘王之身, 三世不妄接地於斉, 以絶従親之要.
신문물지즉만 동하시야; 치지즉위 누기시야. 금대국지지 편천하유기이수 차종생민이래 만승지지미상유야 선제문왕 장왕지신 삼세불망접지어제 이절종친지요.
신은 사물이 끝에 이르면 되돌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여름과 겨울이 그것입니다. 또 너무 높으면 위태로워집니다. 바둑돌을 쌓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금 대국의 땅은 천하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에 이릅니다. 사람이 생긴 이래 이렇게 넓은 나라는 없었습니다. 선왕이신 문왕(文王), 장왕(莊王)으로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땅은 제(齊)나라와 접경하여 합종의 연맹을 끊고자 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今王使盛橋守事於韓, 盛橋以其地入秦, 是王不用甲, 不信威, 而得百里之地. 王可謂能矣. 王又挙甲而攻魏, 杜大梁之門, 挙河內, 抜燕、酸棗、虛、桃, 入邢, 魏之兵雲翔而不敢捄. 王之功亦多矣.
영왕사성교수사어한 성교이기지입진 시왕불용갑 불신위 이득백리지지. 왕가위능의. 왕우거갑이공위 두 대양지문 거하내 발연 산조 허 도 입형 위지병운상이불감구. 왕지공역다의.
지금 왕께서 성교(盛橋)를 한나라에 보내 일을 맡게 하니, 성교는 그 땅을 진나라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는 왕께서 군대를 쓰지도 않고 위력을 보이지도 않고 백리의 땅을 얻으신 것이니 왕께서는 정말 능력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께서 또 군대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여 대량의 문을 막아버리고, 하내를 탈취하여 연(燕)나라, 산조(酸棗), 허(虛), 도(桃)를 점령한 다음 형(邢)나라까지 들어가셨습니다. 위나라의 군대는 구름처럼 흩어져서는 감히 구원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왕의 공이 참으로 크고 많습니다.
王休甲息衆, 二年而後複之;又並蒲、衍、首、垣, 以臨仁、平丘, 黃、済陽嬰城而魏氏服;王又割濮磿之北, 注斉秦之要, 絶楚趙之脊, 天下五合六聚而不敢救. 王之威亦単矣.
왕휴갑식중 이년이후복지 우병포 연 수 원 이임인 평구 황 제양성이위시뽁; 왕우할복역지북 주제진지요 절초조지척 천하오합육위이불감구. 왕지위역단의.
대왕께서는 군대를 쉬게 한 다음 2년 뒤 다시 출병하여 (위나라의) 포(蒲), 연(衍), 수(首), 원(垣)을 합병하고, 인(仁), 평구(平丘)로 나아가니 황(黃), 제양(濟陽)이 성을 닫고 나오지 못했고, 위나라는 굴복했습니다. 왕께서는 또 복(濮), 역(磿) 이북을 나누어 취하여 제나라와 진나라를 연결하고 초나라와 조나라의 척추를 끊어 버리니 천하가 여러 차례 연합했지만 감히 구하러 나서지 못했습니다. 왕의 위세 또한 극에 이르렀습니다.
王若能持功守威, 絀攻取之心而肥仁義之地, 使無後患, 三王不足四, 五伯不足六也. 王若負人徒之衆, 仗兵革之彊, 乗毀魏之威, 而欲以力臣天下之主, 臣恐其有後患也.
왕약능지공수위 줄공취지심이비인의지지 사무후환 삼왕부족사 오백부족육야. 왕약부인도지중 강병혁지강 승훼위지위 이욕이역신천하지주 신공기유후환야.
왕께서 공적과 위세를 지키면서 공격하여 빼앗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어질고 의로운 마음을 더 길러 후환이 없게 하실 수 있다면 삼왕이나 오패도 왕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왕께서 만약 사람 많은 것과 병력 강한 것만 믿고 위나라를 허문 위세를 빌려서 힘으로 천하를 신하로 만들려 하신다면 신은 그에 따르는 후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詩曰「靡不有初, 鮮克有終」. 易曰「狐渉水, 濡其尾」. 此言始之易, 終之難也. 何以知其然也? 昔智氏見伐趙之利而不知楡次之禍, 呉見伐斉之便而不知幹隧之敗. 此二國者, 非無大功也, 沒利於前而易患於後也. 呉之信越也, 従而伐斉, 既勝斉人於艾陵, 還為越王禽三渚之浦. 智氏之信韓、魏也, 従而伐趙, 攻晉陽城, 勝有日矣, 韓、魏叛之, 殺智伯瑤於鑿台之下.
시왈 ‘미불유초 선극유종’ 역왈 ‘호섭수 유기미’. 차언시지이 종지난야. 하이지기연야? 석지씨견벌조지리이부지유차지화 오견벌제지변이부지간수지패. 차이국자 비무대공야 몰리어전이역환후야. 오지신월야 종이벌제 기승제인어애릉 환위월왕금삼자지포. 지씨지신한 위야 종이벌조 공진양성 승유일의 한 위반지 살지백요어착대지하.
『시경(詩經)』에 ‘없지는 않으나 끝이 좋은 경우는 드물다’라고 했고, 『역경(易經)』에는 ‘여우가 (조심조심) 물을 건너지만 꼬리를 적시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하긴 쉽지만 끝까지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옛날 지씨(智氏; 지백)는 조나라를 치는 이익만 보고 유차(楡次)에서의 화를 못 보았고, 오나라는 제나라를 토벌하는 편리만 보고 간수(干隧)에서의 패배를 몰랐습니다. 이 두 나라는 큰 공이 없는 것도 아닌데 눈앞의 이익에 몰두하다가 뒤이어 올 우환을 몰랐습니다. 오나라는 월나라를 믿고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에게 승리했지만 돌아오다가 삼저(三渚)의 물가에서 월나라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지씨는 한나라와 위나라를 믿고 함께 조나라를 공격하여 진양성(晉陽城)을 포위해 승리를 눈앞에 두었는데 한나라와 위나라가 배반하여 지백요(智伯瑤)를 착대(鑿臺)에서 죽였습니다.
今王妒楚之不毀也, 而忘毀楚之彊韓、魏也, 臣為王慮而不取也.
금왕시초지불훼야 이망훼초지강한 위야 신위왕려이불취야.
지금 왕께서는 초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에만 불만을 갖고 계실 뿐, 초나라가 망하면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진다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신이 왕을 위해 생각해본다면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詩曰「大武遠宅而不渉」. 従此観之, 楚國, 援也;鄰國, 敵也. 詩云「趯趯毚免, 還犬獲之. 他人有心, 餘忖度之」.
시왈 ‘대무원택이불보’ 종차관지 초국 원야 린국 적야. 시운 ‘약약참면 환견획지. 타인유심 여촌도지’.
『시경』에 ‘천 리 밖 멀리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초나라는 한 편이고, 이웃 나라(한나라, 위나라)가 적입니다. 『시경』에 ‘약은 토끼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사냥개를 만나면 잡힌다. 다른 사람에게 생각이 있지만 내가 한번 헤아리면 바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今王中道而信韓、魏之善王也, 此正呉之信越也. 臣聞之, 敵不可仮, 時不可失. 臣恐韓、魏卑辭除患而実欲欺大國也. 何則? 王無重世之徳於韓、魏, 而有累世之怨焉. 夫韓、魏父子兄弟接踵而死於秦者將十世矣. 本國殘, 社稷壊, 宗廟毀. 刳腹絶腸, 折頚摺頤, 首身分離, 暴骸骨於草沢, 頭顱僵仆, 相望於境, 父子老弱係脰束手為群虜者相及於路. 鬼神孤傷, 無所血食. 人民不聊生, 族類離散, 流亡為僕妾者, 盈満海內矣. 故韓、魏之不亡, 秦社稷之憂也, 今王資之與攻楚, 不亦過乎!
금왕중도이신한 위지선왕야 차정오지신월야. 신문지 적불가반 시불가실. 신공한 위비사제환이실욕기대국야. 하즉? 왕무중새지덕어한 위 이유루세지원언. 부한 위부자형재접종이사어진자장십세의. 본국잔 사직괴 종묘훼. 고복절장 절경접이 수신분리 폭해골어초택 두로강부 상망어경 부자노약계두속수위군노작상급어로. 귀신고상 무소혈식. 인민불료생 족유이산 유망위복접자 영만해내의. 고한 위지불망 진사직지우야 금왕자지여공초 불역과호!
지금 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가 왕을 잘 대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믿고 계신데 이것이 바로 오나라의 월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은 적에게 겨를을 주어서는 안 되며 때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한나라와 위나라가 공손한 말로 근심을 없애려는 것이 실은 대국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닌가 걱정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에 오랫동안 덕을 베푼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한나라, 위나라의 부모형제들은 지금까지 계속 진나라에게 죽임을 당해온 지 10대에 이릅니다. 본국은 망하고 사직과 종묘는 허물어졌습니다. 배는 갈라져 내장은 끊어졌고, 목은 잘리어 얼굴이 문드러졌으며, 머리와 몸이 나뉘고, 해골은 풀밭과 연못에 널부러졌고, 머리통은 땅바닥에 엎어진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비와 아들, 노약자들은 손과 목을 묶인 채 줄줄이 포로가 되어 길을 메웁니다. 귀신들은 오갈 데 없고 제사도 받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가족은 흩어져 떠돌다 노복이나 첩이 되니 천하를 가득 채울 정도입니다. 그러니 한나라, 위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진나라의 사직에 근심거리가 됩니다. 그런데도 지금 왕께서는 그들을 믿고 초나라를 공격하려 하시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且王攻楚將悪出兵? 王將借路於仇讎之韓、魏乎? 兵出之日而王憂其不返也, 是王以兵資於仇讎之韓、魏也. 王若不借路於仇讎之韓、魏, 必攻隨水右壌. 隨水右壌, 此皆広川大水, 山林谿谷, 不食之地也, 王雖有之, 不為得地. 是王有毀楚之名而無得地之実也.
차왕공초장오출병? 왕장차로어구수지한 위호? 병출지일이왕우기불반야 시왕이병자어구수지한 위야. 왕약불차로어구수지한 위 필공수수우양. 수수우양 차개광천대수 산림계곡 불식지지야 왕수유지 불위득지. 시왕유훼초지명이무득지지실야.
그리고 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신다면 어떻게 출병하시렵니까? 왕께서는 원수인 한나라, 위나라로부터 길을 빌리시렵니까? 출병 그날부터 왕께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는 왕께서 군대를 원수인 한나라, 위나라에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왕께서 원수인 한나라, 위나라에게 길을 빌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수수(隨水)의 남안으로 진공해야 합니다. 수수의 남안은 큰 하천과 산 그리고 계곡으로 먹을 것이 나지 않는 땅이라 왕께서 차지하신다 해도 차지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왕께서 초나라를 허물었다는 명성은 얻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땅은 얻지 못한 꼴이 됩니다.
且王攻楚之日, 四國必悉起兵以應王. 秦、楚之兵構而不離, 魏氏將出而攻留、方與、銍、湖陵、碭、蕭、相, 故宋必盡. 斉人南面攻楚, 泗上必挙. 此皆平原四達, 膏腴之地, 而使獨攻.
차왕공초지일 사국필실기병이응왕. 진 초지병구이불리 위씨장출이공유 방여 질 호릉 탕 소 상 고송필진. 제인남면공초 사상필거. 차개평원사달 고비지지 이사독공.
그리고 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는 날에는 네 나라가 모두 왕처럼 군대를 일으킬 것입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얽히어서 떨어지지 않고 싸우면 그 틈에 위나라가 군대를 내어 유(留), 방여(方與), 질(銍), 호릉(湖陵), 탕(碭), 소(蕭), 상(相)을 공격하여 과거 송나라의 땅을 전부 차지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나라는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사수(泗水) 유역을 차지할 것이 뻔합니다. 이곳들은 모두 사통팔달의 평원에 기름진 땅인데 결국 저들이 독차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王破楚以肥韓、魏於中國而勁斉. 韓、魏之彊, 足以校於秦. 斉南以泗水為境, 東負海, 北倚河, 而無後患, 天下之國莫彊於斉、魏, 斉、魏得地葆利而詳事下吏, 一年之後, 為帝未能, 其於禁王之為帝有餘矣.
왕파초이비한 위어중국이경제. 한 위지강 족이교어진. 제남이사수위경 동부해 북의하 이무후환 천하지국막강어제 위 제 위득지보리이상사하리 일년지후 위제미능 기어금왕지위제유여의.
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면 중국에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살찌게 하고 제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져서 진나라에 맞서기에 충분합니다. 거기에 제나라가 남쪽으로 사수를 경계로 삼고, 동으로 바다를 끼고, 북으로 황하를 의지하게 되면 아무런 걱정이 없으니 천하에 제나라와 위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게 됩니다. 제나라와 위나라가 지리적 이점을 얻으면 거짓으로 몸을 낮출 것이고, 그렇게 1년 정도가 흐르면 스스로 제왕을 칭하지는 못하더라도 왕께서 천하 제왕이 되려는 것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게 됩니다.
夫以王壌土之博, 人徒之衆, 兵革之彊, 壱挙事而樹怨於楚, 遅令韓、魏帰帝重於斉, 是王失計也. 臣為王慮, 莫若善楚. 秦、楚合而為一以臨韓, 韓必斂手. 王施以東山之険, 帯以曲河之利, 韓必為関內之侯. 若是而王以十萬戍鄭, 梁氏寒心, 許、鄢陵嬰城, 而上蔡、召陵不往來也, 如此而魏亦関內侯矣. 王壱善楚, 而関內両萬乗之主注地於斉, 斉右壌可拱手而取也. 王之地一経両海, 要約天下, 是燕、趙無斉、楚, 斉、楚無燕、趙也. 然後危動燕、趙, 直揺斉、楚, 此四國者不待痛而服矣.
부이왕양토지박 인도지중 병혁지강 일거사이수원어초 지영한 위귀제중어제 시왕실계야. 신위왕혀 막약선초, 진 초합이위일이임한 한필검수. 왕시이동산지험 대이곡하지리 한칠위관내지후. 약시이왕이십만수정 양씨한심 허 언릉영성 이상채 소릉불왕래야 여차이위역관내후의, 왕일선초 이관내영만승지주주지어제 제우양가공수이취야. 왕지지일경양해 요약천하 시연 조문제 초 제 초무연 조야. 연후위동연 조 직요재 초 차사국자불대통이복의.
무릇 왕과 같이 넓은 땅, 많은 백성,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한 번의 일로 초나라와 원수가 지고 한나라, 위나라로 하여금 제왕의 호칭을 제나라에다 바치게 만든다면 이는 왕의 실책입니다. 신이 왕을 위해 생각해보니 초나라와 잘 지내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하나로 합쳐 한나라를 상대하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손을 거둘 것입니다. 왕께서 산동의 험준함을 통제하고 곡하(曲河)의 유리함을 차지하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관내의 제후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하고 왕께서 10만 병력으로 (한나라의 도읍) 정(鄭)을 지키면 양씨(위)의 심장은 서늘해지고, 허(許)와 언릉(鄢陵)은 나오지 못하고 성을 지키게 될 것이니 상채(上蔡)와 소릉(召陵)으로 통하는 길은 왕래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위나라 역시 관내의 제후로 남게 되겠지요. 왕께서 오로지 초나라와 잘 지내시면 만승의 나라 두 군주가 관내후가 되고, (진나라는) 제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어 제나라의 서쪽 땅은 손을 모으고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왕의 땅은 서해에서 동해에 이르러 천하를 통제하게 되니 연나라, 조나라는 제나라, 초나라와 연계하지 못하고, 제나라, 초나라는 연나라, 조나라와 연계하지 못합니다. 그런 다음 연나라, 조나라를 위협하여 곧장 제나라, 초나라를 흔들면 이 네 나라는 공격하지 않아도 굴복할 것입니다.”
昭王曰:「善.」於是乃止白起而謝韓、魏. 発使賂楚, 約為與國.
소왕왈 ‘선; 어시내지백기이사한 위. 발사뢰처 약위여국.
소왕은 ‘좋습니다.’라 하고는 백기의 진격을 제지하는 한편 한나라와 위나라에 이를 알렸다. 또 사신을 초나라에 보내 후한 예물로 연맹하기로 약속했다.
黃歇受約帰楚, 楚使歇與太子完入質於秦, 秦留之數年. 楚頃襄王病, 太子不得帰. 而楚太子與秦相應侯善, 於是黃歇乃説應侯曰:「相國誠善楚太子乎?」應侯曰:「然.」歇曰:
황헐수약귀초 초사헐여태자완입질어진 진유지수년. 초경양왕병 태자부득귀. 이초태자여ㅑ진상응후선 어시황헐내게응후왈; ‘상국성선초태자호?’ 응후왈 ‘연’ 헐왈:
황헐이 약속을 받고 초나라로 돌아오자 초나라는 황헐과 태자 완(完)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니 진나라는 그들을 머무르게 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초 경양왕이 병이 났으나 태자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초 태자와 진나라의 재상 응후(應侯)는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황헐은 응후에게 유세하길 ‘상국께서는 정말 초 태자와 사이가 좋습니까?’라고 했다. 응후가 ‘그렇소.’라고 했다. 황헐은 이렇게 말했다.
「今楚王恐不起疾, 秦不如帰其太子. 太子得立, 其事秦必重而徳相國無窮, 是親與國而得儲萬乗也. 若不帰, 則鹹陽一布衣耳;楚更立太子, 必不事秦. 夫失與國而絶萬乗之和, 非計也. 願相國孰慮之.」
‘금초왕공불기질 진불여귀기태자. 태자득립 기사진필중이덕상국무궁 시친여국이득저만승야. 약불귀 즉함양일포의이; 초경립태자 필불사진. 부실여국이절만승지화 비계야. 원상국숙여지.’
‘지금 초왕은 아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진나라는 그 태자를 돌려보내느니만 못합니다. 태자가 즉위하면 틀림없이 진나라를 더욱 귀중하게 섬길 것이고 상국에 대한 고마움은 무궁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라끼리 더욱 가까워지면 만승의 나라의 군주 한 사람을 얻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진나라는 초나라의 태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냥 함양의 한 평민일 뿐입니다. 초나라가 다른 태자를 세우면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친한 나라를 잃고 만승의 나라와 화친을 끊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상국께서는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應侯以聞秦王. 秦王曰:「令楚太子之傅先往問楚王之疾, 返而後図之.」黃歇為楚太子計曰:
응후이문진왕. 진왕왈 ‘영초태자지부선왕문초왕지질 반이후도지’ 황헐위초태자계왈:
응후가 이를 진왕에게 전했다. 진왕은 ‘초 태자의 사부를 먼저 보내 초왕의 병을 살피게 하고 돌아온 다음 다시 의논합시다.’라고 했다. 황헐은 초 태자에게 이런 계책을 일러주었다.
「秦之留太子也, 欲以求利也. 今太子力未能有以利秦也, 歇憂之甚. 而陽文君子二人在中, 王若卒大命, 太子不在, 陽文君子必立為後, 太子不得奉宗廟矣. 不如亡秦, 與使者倶出;臣請止, 以死當之.」
‘진지유태자야 욕이구리야. 금태자역미능유이리진야 헐우지심. 이양문군자이인재중 왕약졸대명 태자부재 양문군자필립이위후 태자부득봉종묘의. 불여망진 여사자구출; 신청지 이사당지’
‘진나라가 태자를 구류시키는 것은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태자께서는 진나라를 이롭게 할 힘이 없고, 이 황헐은 그것이 몹시 걱정됩니다. 그리고 (초나라에는) 양문군(陽文君)의 두 아들이 있는데 왕께서 돌아가시면 태자는 국내에 안 계시니 양문군의 아들이 후계자로 옹립될 것이 분명하니 태자께서는 종묘를 받들 수 없게 됩니다. 진나라에서 도망쳐서 사신들과 함께 나가느니만 못합니다. 신이 남아서 죽음으로 감당하겠습니다.’
楚太子因変衣服為楚使者禦以出関, 而黃歇守舎, 常為謝病. 度太子已遠, 秦不能追, 歇乃自言秦昭王曰:「楚太子已帰, 出遠矣. 歇當死, 願賜死.」昭王大怒, 欲聴其自殺也. 應侯曰:「歇為人臣, 出身以徇其主, 太子立, 必用歇, 故不如無罪而帰之, 以親楚.」秦因遣黃歇.
초태자인변의복위초사자어이출관 이황헐수가 상위사병. 도태자이원 진불능추 헐내자언진소왕왈 ‘초태자이귀 출원의 헐당사 원사사’ 소왕대노 욕청기자살야. 응후왈 ‘헐위인신 출신이순기주 태자립 필용헐 고불여무죄이귀지 이친초’ 진인견황헐.
이에 초 태자는 초나라로 가는 사신의 마부로 변복을 하고 관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황헐은 숙소에 머무르며 병을 핑계로 사람 만나기를 사절했다. 태자가 이미 멀리 가서 진나라가 뒤쫓을 수 없게 되자 황헐은 자진해서 진 소왕에게 ‘태자께서는 이미 귀국길에 올라 멀리 가셨습니다. 황헐은 죽어 마땅하니 죽여주십시오.’라고 했다. 소왕이 크게 성을 내며 그의 자살을 받아들이려 했다. 응후가 ‘황헐은 신하된 몸으로서 자신의 몸으로 자기 군주를 섬겼습니다. 태자가 즉위하면 틀림없이 황헐을 기용할 터이니 죄를 묻지 않고 돌려보내서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진나라는 황헐은 돌려보냈다.
歇至楚三月, 楚頃襄王卒, 太子完立, 是為考烈王.
헐지초삼월 초경양왕졸 태자완립 시위고열왕.
황헐이 초나라로 온 지 석 달, 초 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完)이 즉위하니 이가 고열왕(考烈王)이다.
考烈王元年, 以黃歇為相, 封為春申君, 賜淮北地十二県.
고열왕원년 이황헐위상 봉위춘신군 사회북지십이현.
고열왕 원년에 왕은 황헐을 재상에 등용하고 춘신군(春申君)에 봉하여 회수 이북 땅 열 두 개의 현을 주었다.
後十五歳, 黃歇言之楚王曰:「淮北地邊斉, 其事急, 請以為郡便.」因並獻淮北十二県. 請封於江東. 考烈王許之. 春申君因城故呉墟, 以自為都邑.
후십오세 황헐언지초왕왈 ‘회북지변제 기사급 청이위군변’ 인병헌회북십이현. 청봉어강동. 고열왕허지. 춘신군인성고오허 이자위도읍.
그 뒤 15년에 황헐이 초왕에게 ‘회수 이북 땅은 제나라와 붙어 있어 급한 일이 발생하니 군으로 삼는 것이 편리합니다.’라 하고는 회수 북쪽 열 두 개의 현을 바치면서 강동을 봉지로 요청했다. 고열왕이 이를 허락했다. 춘신군은 이에 옛 오나라 도성 폐허에 성을 쌓고 자신의 도성으로 삼았다.
春申君既相楚, 是時斉有孟嘗君, 趙有平原君, 魏有信陵君, 方爭下士, 招致賓客, 以相傾奪, 輔國持権.
춘신군기상초 시시제유맹상군 조유평원군 위유신릉군 방쟁하사 초치빈객 이상경탈 보국지권.
춘신군이 초열 두 개의의 재상으로 있을 당시 제열 두 개의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조열 두 개의에는 평원군(平原君)이,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어 다투어 낮은 자세로 인재를 모시고 빈객들을 초청하여 서로 싸우면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다.
春申君為楚相四年, 秦破趙之長平軍四十餘萬.
춘신군위초상사년 진파조지장평군사십여만.
춘신군이 초열 두 개의의 재상이 된 지 4년에 진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40여 만 군대를 격파했다.
五年, 囲邯鄲. 邯鄲告急於楚, 楚使春申君將兵往救之, 秦兵亦去, 春申君帰.
오년 위한단. 한단고급어초 초사춘신군장병왕구지 진병역거 춘신군귀.
5년에 (진나라는) 한단을 포위했다. 한단은 초나라에 위급함을 알렸고, 초나라는 춘신군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으나 진나라의 군대가 떠나고 없어 춘신군도 돌아왔다.
春申君相楚八年, 為楚北伐滅魯, 以荀卿為蘭陵令. 當是時, 楚複彊.
춘신군상초팔년 위초북벌멸노 이순경위란능영. 당시시 초복강.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으로 있은 지 8년에 초나라를 위하여 북으로 노(魯)나라를 토벌하여 멸망시켰고, 순경(荀卿; 순자)을 난릉령(蘭陵令)에 임명했다. 이 무렵 초나라는 다시 강해졌다.
趙平原君使人於春申君, 春申君舎之於上舎. 趙使欲誇楚, 為玳瑁簪, 刀剣室以珠玉飾之, 請命春申君客. 春申君客三千餘人, 其上客皆躡珠履以見趙使, 趙使大慚.
조평원군사인어춘신군 춘신군사지어상사. 조사욕과초 위대모잠 도검실이주옥식지 청명춘신군객. 춘신군객삼천여인 기상객개섭주리이견조사 조사대참.
조나라의 평원군이 춘신군에게 사람을 보내자, 춘신군은 그들을 상급 관사에 머무르게 했다. 조나라의 사신들은 초나라에서 자신들을 과시하려고 머리에는 대모잠(玳瑁簪)을 꽂고 구슬과 옥 등으로 장식한 칼집을 차고 춘신군의 식객과 만나고자 했다. 춘신군의 식객은 3천이 넘었는데, 그 중 상급 식객들이 모두 구슬로 장식된 신발을 신고 조나라의 사신을 만났더니 조나라의 사신들은 크게 부끄러워했다.
春申君相十四年, 秦荘襄王立, 以呂不韋為相, 封為文信侯. 取東周.
춘신군상십사년 진장양왕립 이여불위위상 봉위문신후. 취동주.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14년에 진나라의 장양왕(莊襄王)이 즉위하여 여불위(呂不韋)를 재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했다. 동주(東周)를 취했다.
春申君相二十二年, 諸侯患秦攻伐無已時, 乃相與合従, 西伐秦, 而楚王為従長, 春申君用事. 至函谷関, 秦出兵攻, 諸侯兵皆敗走. 楚考烈王以咎春申君, 春申君以此益疏.
춘신군상십이년 제후환진공벌무이시 내상여합종 서벌진 이초왕위종장 춘신군용사. 지함곡관 진풀병공 제후병개패주. 초고열왕이구춘신군 춘신군이차익소.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22년에 제후들은 진나라의 시도 때도 없는 공격이 걱정되어 바로 서로 합종하여 서쪽으로 진나라를 치기로 하고 초왕을 종약장으로 삼고 춘신군에게 일을 맡겼다.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가 군대를 내어 공격하자 제후의 군대들은 모두 패주했다. 초 고열왕은 춘신군을 나무랐고, 춘신군은 이로부터 (초왕과) 더 멀어졌다.
客有観津人朱英, 謂春申君曰:
객유관진인주영 위춘신군왈:
식객 중에 관진(觀津) 사람 주영(朱英)이라는 자가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人皆以楚為彊而君用之弱, 其於英不然. 先君時善秦二十年而不攻楚, 何也? 秦踰黽隘之塞而攻楚, 不便;仮道於両周, 背韓、魏而攻楚, 不可. 今則不然, 魏旦暮亡, 不能愛許、鄢陵, 其許魏割以與秦. 秦兵去陳百六十里, 臣之所観者, 見秦、楚之日鬥也.」
‘인개이초위강이군용지약 기거영불연. 선군시선진이십년이불공초 하야? 진유면예지새이공초 불편; 가도어양주 배한 위이공초 불가. 금즉불연 위단모망 불능애허 언릉 기러위할이여진. 진병거ㅏ진백육십리 신지소관자 견진 초지일투야’
‘사람들은 모두 초나라가 강했지만 춘신군이 약하게 만들었다고 여기고 있으나 이 주영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전대 왕 때 진나라는 20년 동안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겠습니까? 진나라가 면애(黽隘)라는 요새를 넘어 초나라를 공격하기가 불편했고, 동주와 서주로부터 길을 빌릴 경우에도 한나라와 위나라를 등지고 초나라를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나라의 멸망이 아침저녁이라 허와 언릉조차 돌볼 겨를이 없으며, 땅을 떼어서 진나라에게 준다고도 합니다. 그럴 경우 진나라의 군대와 진(陳)나라는 불과 160 리 떨어진 상황이라 신이 보게 될 것은 진나라와 초나라가 허구한 날 싸우는 것입니다.’
楚於是去陳徙壽春;而秦徙衛野王, 作置東郡. 春申君由此就封於呉, 行相事.
초어시거진사수춘: 이진사위야왕 작치동군. 춘신군유차취봉어오 행상사.
초나라는 이에 진(陳)나라를 떠나 수춘(壽春)으로 옮겼다. 그러자 진나라는 위(衛)를 야왕(野王)으로 옮기고, 그곳에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춘신군은 이로써 오(吳)에 봉해져 재상의 일을 보았다.
楚考烈王無子, 春申君患之, 求婦人宜子者進之, 甚衆, 卒無子. 趙人李園持其女弟, 欲進之楚王, 聞其不宜子, 恐久毋寵. 李園求事春申君為舎人, 已而謁帰, 故失期. 還謁, 春申君問之狀, 対曰:「斉王使使求臣之女弟, 與其使者飲, 故失期.」春申君曰:「娉入乎?」対曰:「未也.」春申君曰:「可得見乎?」曰:「可.」
초고열왕무자 춘신군환지 구부인의자자진지 심중 졸무자. 조인이원지기여제 욕진지초왕 문기불의자 공구무총. 이원구사춘신군위사인 이이알귀 고실기. 환알 춘신군문지상 대왈 ‘제왕사사구신지여제 여기사자음 고실기’ 춘신순왈 ‘빙입호?’ 대왈 ‘미야’ 춘신군왈 ‘가득견호?’ 왈 ‘가’
초나라 고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춘신군이 이를 걱정하여 아들을 잘 낳을 여자를 여러 명 구해 들여보냈으나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조나라 사람 이원(李園)이 자신의 여동생을 데리고 와서 그녀를 초왕에게 들여보내려 했으나 왕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오래 총애를 받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이에 이원은 춘신군을 모시면서 사인(舍人)이 되었다. 한번은 귀가를 요청했다가 일부러 날짜를 놓쳤다. 돌아와 인사를 올리자 춘신군이 늦은 이유를 물었더니 ‘제왕이 사신을 보내와 나의 누이를 원해서 그 사신과 술을 마시느라 늦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춘신군은 ‘장가왔소?’라고 묻자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춘신군이 ‘내가 만나 볼 수 있겠소.’라고 하자 ‘좋습니다.’라고 했다.
於是李園乃進其女弟, 即幸於春申君. 知其有身, 李園乃與其女弟謀. 園女弟承閒以説春申君曰:
어시이원내진기여제 즉행어춘신군. 지기유신 이원내여기여제모. 원여제승간이세춘신군왈:
이에 이원은 그 누이를 춘신군에게 들여보냈고, 이내 춘신군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자 이원은 바로 그 누이와 공모했다. 이원의 누이는 틈을 타서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楚王之貴幸君, 雖兄弟不如也. 今君相楚二十餘年, 而王無子, 即百歳後將更立兄弟, 則楚更立君後, 亦各貴其故所親, 君又安得長有寵乎? 非徒然也, 君貴用事久, 多失禮於王兄弟, 兄弟誠立, 禍且及身, 何以保相印江東之封乎?
‘초왕지귀행군 수형제불여야. 금군상초이십여년 이왕무자 즉백세후장경립형제 즉초경립군후 역각귀기고소친 군우안득장유총호? 비도연야 군귀용사구 다실례어왕형제 형제성립 화차급신 하이보상인강동지봉호?
‘초왕께서 군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형제라도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지금 군께서 초나라의 재상을 20년 넘게 지내시고 있고, 왕께는 아들이 없습니다. 왕이 돌아가시면 다른 형제가 즉위할 것이고, 초나라의 왕이 바뀌면 자신과 친했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길 것인데, 군께서 어떻게 오래도록 총애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군께서는 오랫동안 귀하신 몸으로 일을 주도해왔기 때문에 왕의 형제들의 불만을 많이 샀을 것입니다. 왕의 형제가 진짜 즉위하면 그 화가 군에게 미칠 것인데 무슨 수로 재상의 도장을 지니고 강동의 봉지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今妾自知有身矣, 而人莫知. 妾幸君未久, 誠以君之重而進妾於楚王, 王必幸妾;妾頼天有子男, 則是君之子為王也, 楚國盡可得, 孰與身臨不測之罪乎?」
금첩자지유신의 이인막지. 첩행군미구 성이군지중이진접어초왕 왕필행첩; 접뢰천유자남 즉시군지자위왕야 초국진가득 집여신임불측지죄호?’
지금 소첩만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지 아무도 모릅니다. 신첩이 군의 사랑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군의 지위로 신첩을 초왕께서 들여 보내주신다면 왕께서는 틀림없이 신첩을 아끼실 것이고, 신첩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아들을 낳게 되면 군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니 초나라를 전부 얻을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화를 당하는 것과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春申君大然之, 乃出李園女弟, 謹舎而言之楚王. 楚王召入幸之, 遂生子男, 立為太子, 以李園女弟為王後. 楚王貴李園, 園用事.
춘신군대연의 내축이원여제 근사이언지초왕. 초왕소입행지 수생자남 입위태자 이이원여제위왕후. 초왕귀이원 원용사.
춘신군은 매우 맞는 말이라고 여겨 곧 이원의 누이를 관사로 내보낸 다음 초왕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 초왕이 불러서 그녀를 예뻐했고, 마침내 아들을 낳아 태자로 세우니 이원의 누이는 왕후가 되었다. 초왕은 또 이원을 중용했고, 이원은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李園既入其女弟, 立為王後, 子為太子, 恐春申君語泄而益驕, 陰養死士, 欲殺春申君以滅口, 而國人頗有知之者.
이원기입기여제 입위왕후 자위태자 공춘신군어설이익교 음양사사 욕살춘신순이멸구 이국인번유지지자.
이원은 그 누이를 들여보내 왕후가 되고 아들이 태자가 되자 춘신군이 이 일을 발설하거나 더욱 교만해질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몰래 결사대를 길러 춘신군을 죽여 입을 막으려 했다. 나라 사람들 중 이를 아는 사람이 많았다.
春申君相二十五年, 楚考烈王病. 朱英謂春申君曰:「世有毋望之福, 又有毋望之禍. 今君処毋望之世, 事毋望之主, 安可以無毋望之人乎?」春申君曰:「何謂毋望之福?」曰:「君相楚二十餘年矣, 雖名相國, 実楚王也. 今楚王病, 旦暮且卒, 而君相少主, 因而代立當國, 如伊尹、周公, 王長而反政, 不即遂南面稱孤而有楚國? 此所謂毋望之福也.」
춘신군상이십오년 초고열왕병. 주영위춘신군왈 ‘세유무망지복 우유무망지화. 금군처무망지세 사무망지주 한가이무무망지인호?’ 춘신군왈 ‘하위무망지복?’ 왈 ‘군상초이십여년의 수명상국 실초왕야. 금초왕병 단모차졸 이군상소주 인이대립당국 여이윤 주공 왕장이반정 불즉수남면칭고이유국? 차소위무망지복야’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25년에 초 고열왕이 병이 났다. 주영은 춘신군에게 ‘세상에는 바라지 않던 복이 있을 수도 있고, 바라지 않는 화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군께서는 바라지 않던 세상에 있고, 바라지 않는 군주를 섬기고 계신데 어찌 하여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춘신군이 ‘바라지 않던 복이란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군께서 초나라의 재상으로 20년 넘게 계셨는데 이름이 재상이지 실은 초왕이었습니다. 지금 초왕께서 병이 나서 죽을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럴 경우 군께서는 재상으로 어린 군주를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하실 터이니 이는 이윤(伊尹), 주공(周公)과 같습니다. 왕이 장성하여 정권을 돌려줄 때도 그렇게 하기 싫으면 남면하여 왕으로 칭하고 초나라를 가지면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바라지 않던 복이란 것입니다.’
春申君曰:「何謂毋望之禍?」曰:「李園不治國而君之仇也, 不為兵而養死士之日久矣, 楚王卒, 李園必先入拠権而殺君以滅口. 此所謂毋望之禍也.」春申君曰:「何謂毋望之人?」対曰:「君置臣郎中, 楚王卒, 李園必先入, 臣為君殺李園. 此所謂毋望之人也.」
춘신군왈 ‘하위무망지화’ 왈 ‘이원불치국이군지구야 불위병이양사사지일구의 초왕졸 이원필선입거권이살군이멸구. 차소위무망지화야’ 춘신군왈 ‘하위무망지인?’ 대왈: ‘군치신랑중 초왕졸 이원필선입 신위군살이원. 차소위무망지인야’
춘신군은 ‘그럼 바라지 않는 화란 무엇이오?’라고 했다. 주영이 ‘이원은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있지만 군의 맞수입니다. 군대는 없지만 결사대를 기른 지 오래입니다. 초왕께서 돌아가시면 이원은 틀림없이 먼저 들어가 권력을 차지하고 군을 죽여서 입을 막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바라지 않는 화란 것입니다.’라고 했다. 춘신군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란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주영은 ‘군께서는 신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해주십시오. 초왕이 돌아가시면 이원은 틀림없이 먼저 궁궐로 들어올 것이니 신이 군을 위하여 이원을 죽이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생각지도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春申君曰:「足下置之, 李園, 弱人也, 僕又善之, 且又何至此!」朱英知言不用, 恐禍及身, 乃亡去.
춘신군왈 ‘족하치지 이원 약인야 복우선지 차우하지차!’ 주영지언불용 공화급신 내망거.
춘신군은 ‘그대는 그만 하시오. 이원은 약한 사람이고 내가 또 잘 해주고 있는데 어찌 그렇게 하겠소.’라고 했다. 주영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바로 도망쳤다.
後十七日, 楚考烈王卒, 李園果先入, 伏死士於棘門之內. 春申君入棘門, 園死士俠刺春申君, 斬其頭, 投之棘門外. 於是遂使吏盡滅春申君之家. 而李園女弟初幸春申君有身而入之王所生子者遂立, 是為楚幽王.
후십칠일 초고열왕졸 이원과선입 복사사어극문지내. 춘신군입극문 원사사협자춘신군 참기두 투지극문외. 어시수사리진멸춘신군지가. 이이원여제초행춘신순유신이입지왕소생자수립 시위초유왕.
그로부터 17일 뒤에 초 고열왕이 죽었다. 이원이 과연 먼저 궁궐에 진입하여 결사대를 극문(棘門) 안에 매복시켰다. 춘신군이 극문을 들어서자 이원의 결사대는 춘신군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극문 밖으로 던졌다. 이어 사람을 시켜 춘신군의 집안을 모조리 없앴다. 그리고 이원의 누이는 처음 춘신군의 총애를 받아 임신한 다음 왕궁에 들어가 낳은 아들이 즉위하니 이가 초 유왕(幽王)이다.
是歳也, 秦始皇帝立九年矣. 嫪毐亦為亂於秦, 覚, 夷其三族, 而呂不韋廃.
시세야 진시황제립구년의. 노애역위난어진 각 이기삼족 이여불위폐.
이해가 진시황(秦始皇) 즉위 9년이었는데, 노애(嫪毐)가 또 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발각되어 삼족이 몰살당했고, 여불위(呂不韋)가 쫓겨났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吾適楚, 観春申君故城, 宮室盛矣哉! 初, 春申君之説秦昭王, 及出身遣楚太子帰, 何其智之明也! 後制於李園, 旄矣. 語曰:「當斷不斷, 反受其亂.」春申君失朱英之謂邪?
태사공왈 ; 오적초 관춘신군고성 궁실성의재! 초 춘신군지세진소왕 급출신견초태자귀 하기지지명야! 후제어이원 모의. 어왈 ‘당단불단 반수기란’ 춘신군실주영지위야?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초나라에 가서 춘신군의 옛 성을 보았는데 궁실이 호화로웠다. 당초 춘신군이 진 소왕에게 유세하고, 그 몸을 희생해가며 초 태자를 돌려보냈으니 얼마나 지혜로웠던가! 그 뒤 이원에게 통제 당했으니, 늙었구나. 속담에 “잘라야 할 때 자르지 못하면 도리어 그 환란을 당한다.”고 했다.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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